[스크랩] 알고 있는 형 이야기(자비편)
알고 있는 형 이야기(자비편)
형 자비라는 말은 꼭 불교용어같은데 왜 성경에 있는거야?
교회 부흥의 큰 자산은 자비 혹은 "친절"이라고 하지.
구약 신명기 말씀도 성도의 자산, 축복의 자산이 자비 혹은 "친절"이라고 말해.
자비는 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라고 해.
킹제임스버전(KJV)에서는 gentleness - 온유함 혹은 관대함이라고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를 자비라고 하지.
NIV 성경에서는 kindness - "친절"이라고 번역하는데, "모든 사람 - 특별히 긍휼이 필요한 작은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자비야.
친절, 자비라는 헬라어의 「크레스토테스」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비슷하지.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크레스토테스」와 「크리스토스」를 많이 혼용했다고 해.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친절하고 자애로운 분으로 생각했지.
그리스도의 제자이면서도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신은 그리스도인인데 왜 친절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해.
대강 이해는 되는데 성경에 자비하고 비슷한 개념들이 많아 혼용되고 있어서 혼동되는데 설명가능해?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자비로우심은 모든 죄인들을 향하신 긍휼을 사용하고 있어(로마서2;4,에베소서2:7)
이러한 박애와 자비로움은 우리들에게도 남겨져 있지(골로새서3:12)
자비로움은 "인자하심"(창세기19:19), "은혜로우심"(창세기20:13), "긍휼하심"(마태복음9:13)과 동일한 맥락과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
역대상에서 자비는 인애라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어.
자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의 보배와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자비를 구하고 요청하였으며 예수님은 그때마다 그들의 필요를 충족했어.
예수께서는 자비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가르쳤어(마태복음5:43~48)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자비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류의 구원에 있었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비는 일부 총족요건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였어.
그렇네, 그런데 자비가 실제 생활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궁금해지네?
신명기 24:19-22은 자비의 모델, 곧 시청각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지.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19절)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에도 마찬가지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20절)
포도를 딸 때도 꼭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지.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21절)
어떻게 보면 약자에 대한 배려네.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 빵집 등에서 다 남은 것들을
일정한 곳에 두고 가더라고…
집 없는 사람, 아버지 없는 자녀, 남편 없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자비라는 것이지.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키는 힘은 제사신앙과 절기신앙이었어.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그들을 구속하신 목적과 이유가 여기에 있었지.
맘껏 제사를 지내고 행복하게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이스라엘은 언제 일하고 뭘 먹고 살았나 할 만큼 늘 제사요 항상 절기였지.
교회에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이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도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있어.
이 절기 속에 인생의 목적, 행복의 원리가 있지.
하나님께서 이 바쁜 인생들에게 왜 절기를 꼭 지키라고 말씀했을까?
첫째, 네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는 것이야.
이 절기를 통해 인생의 주인, 생명의 주인을 늘 새롭게 깨닫고 살라는 거야.
둘째,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라는 거야.
인생의 행복은 감사하며 사는 것에 있지.
불평은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감사는 인생을 행복하게 해.
셋째, 내 주변에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라는 것이야.
혼자 먹지 말고 함께 먹는 행복을 나누라는 거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며 제사장과 함께 나눠먹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았어.
이것이 자비지.
옛날 성민들은 초막절을 지킬 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생각했고, 돌볼 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자비를 베풀었어.
신약성경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는 나그네 전도자들을 섬기는 것을 자비라고 말하지.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돌보는 것을 자비라고 해.
아파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자비라고 하지.
이웃은 결국 "자비를 베푼자” 이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양과 염소, 왼편에 저주 받을 자와 오른편에 영원한 낙원에서 복 받을 자를 구별하실 때에 "자비"라는 잣대로 판단하신다고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 말해.
무서운 이야기네. 자비로 심판하신다니..
이어서 예수님을 돌보지 않은 사람들, 주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들, 마시우게 하고 먹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저주의 말씀이 나와..
"예수님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이 한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타나셨어야 섬겼을 것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이 내 곁에서 배고파 쓰러져 있는데 대접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니?
그러나 작은 자,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가 작은 주님인 것을 그들은 모르지.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아 그래서 교회를 평가할 때 그 교회에서 가장 약한 지체가 그 교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보면 그 교회를 알 수 있다하는구나.
우리의 가족, 교우 나아가 내 곁의 지극히 작은자, 내 도움이 필요한 그들이 모두 내 면류관임을 알아야 해.
자비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지. 이에 이의가 없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하지.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흉내 내 보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지.
그게 가능해?
내게 결정적 상처를 준 사람, 내 명예에 먹칠한 그 인간을 용납하고 오히려 자비를 베풀라는 것도 그렇고
원수를 환대하고 사랑을 베풀라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항상 되물어 보게 돼.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이 명령 앞에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게 돼.
근데 자비는 성령의 열매야.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야.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맺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는 열매지.
나는 성령님께 나를 드리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 뿐이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지.
자꾸, 깜빡하게 돼. 내가 하는게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다는것. 나야 내 안에 성령님이 없으니까 잊게 되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야.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고도 사울 왕에 의해 긴긴 세월 쫓겨 다니고 죽을 고생을 하지.
원수 같은 사울 왕조가 무너지고 드디어 다윗은 왕이 되는데, 이때 이전 왕통 삼족을 멸하는 것이 통례야.
그런데 왕이 된 다윗이 사울 왕가에 누가 살아있는가 알아보니 사울의 손자 무비보셋이 살아있었는 것을 확인해. 무비보셋은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 두려움에 떨었겠지.
그러나 뜻밖에도 다윗은 무비보셋을 환대해.
모든 기업을 회복시켜 주고 왕실에서 왕의 가족처럼 함께 지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지.
아침 저녁으로 왕과 함께 식탁에 앉았어..
무비보셋이 감격에 겨워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하지.
얼마나 감격했으면 그럴까?
다윗 왕이 이 엄청난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해.
나의 자비, 나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하고 말해.
겸손하기도 하지만 자비의 근원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네.
"은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야.
구약성경에 250번 기록되어 있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는 행위가 헤세드야.
신약의 크레스토테스 - 자비와 같은 뜻이지.
지금은 구체적으로 기억안나는데 다윗이 시편에서 여러가지 고백한 것과 일치하지 않나?
“내가 왕이 된 것은 가문이 좋아서 된 것 아니고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된 것 아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오늘 왕위에 나를 앉혀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로다.
내가 가장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푼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은총이나 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일 뿐이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어.
다윗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살았어.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대표적인 경우는 충복 우리야를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회개해.
시편 51편은 그의 참회록이야.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다윗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하나님 앞에 감히 엎드려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어.
그러나 주의 많은 자비로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했지
아 형 그러니까 우리가 자비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겠네. 그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자비의 열매를 맺게 하시겠군.
응, 이제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는 것 같네.
예수님의 자비가 내 안에 가득채워 지고 성령님이 임하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시면 나를 통하여 자비가 이웃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돼.
우선 자비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작은 친절로 나타나.
예수님은 병든자를 어루만지고 치유하셨어.
예수님은 외로운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셨어.
예수님은 주린자를 먹이셨지.
예수님의 자비는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는 마음이었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생각나네.
응,한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지.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옷은 찢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어.
제사를 집례하고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어.
의도적으로 도망갔다는 얘기지.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그를 불쌍히 여겨 포도주와 기름을 부었고,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지.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오다 갚을 테니 정성스럽게 돌봐주라고 했어.
예수님이 물었어 "누가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자 이니이다" 라고 답했지.
우리가 눈을 들고 성령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어.
건강의 강도를 만나서, 질병의 고통을 안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재물의 강도를 만나서 외로움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의 강도를 만나 힘들어하는 사람들, 우리 민족은 평화의 강도를 만나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지.
그들을 위해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성령의 마음으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함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들, 이들이 자비의 사람들이야.
고통 당하는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 그것이 성령의 열매 자비지.
여태까지 말을 다 정리해보면 이웃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고 품어주는 그 마음이 친절이요 자비야.
성령의 마음으로 내 주위를 살펴보면 언제나 자비가 필요한 작은 자는 있어.
신명기 15장 11절 말씀을 보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 24장 19-22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지.
그들이 양식 없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셔.
집 없는 자, 이 땅에서 인생이 마쳐지는 날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나그네지만, 하늘 집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진정한 객이요 나그네야.
아버지 없는 자식이 고아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영혼의 고아라는 사실이지.
신랑 없는 여인이 과부지. 예수 신랑 모르고 버림 받은 인생이 과부야.
예수 신랑과 깊은 사랑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진정한 과부지
아 그런 깊은 뜻이 또 따로 숨겨져 있었구나.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을 살리는 양식은 예수 양식이지.
복음 양식 나눠주어야 그들이 살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 양식, 생명 양식이지.
따지고 보면 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복음이라는 이야기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자비는 복음이야.
주고 주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랑, 후회도 실망도 없이 보람있는 자비,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축복이 되는 일이야.
왜냐하면 물질을 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야. 받으면 노예가 될 수 있어.
주다 안 주면 원망이 생기고 받으면 약해져.
그러나 복음은 주는 기쁨이 있고 받는 자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게 되지.
하늘집 분양은 안해? 그런 곳이 정말 투기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하늘 집을 나누는 것 그것이 자비야.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버지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자비지.
그들에게 예수 신랑을 소개하는 것이 근사한 자비야.. 그들에게 하늘 양식, 구원 양식, 복음 양식,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비야.
예수 없이 죽어 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지.
아버지 모르고 사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야.
최고의 자비는 천국 집을 나눠주고, 예수 신랑 소개하고, 영생을 선물하는 거야.
그러면 형은 지금 나에게 최고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셈이네.
# 다음 카페 위로부터와 창골산 봉서방의 자비를 완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흐르는 음악:새찬송가 395장 자비하신 예수여,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나는 죽고 주가 살고 최인혁 단장님
배경 그림: 제임스 티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suffer)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