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보혜사 성령님이 어떤 일을 도우신가? ...
제 9 장: 소경을 고치심
본장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설명하신 빛에 대한 배경의 주석이 9장이라고 볼 수 있다(소품, 시청각 교제 등장). 시작은 표적으로 보여 주시는데, 5장처럼 죽음의 세력 안에 있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고침의 물리적인 사건을 통해 영생을 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반대로 죽음의 세력에 증상은 38년 병자의 고통이었다. 태초의 안식일을 회복하여 종말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를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9장에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심은(16) 안식일인데 소경이 있으니 진정한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래 창조 상태로 밝은 천지를 볼 수 없으니 진정한 안식일이 아닌 것이다.
소경을 고치심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와 그 안에 빛을 만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서 태초 천지창조 빛을 잃은 사람이다. 소경된 사람은 빛과 생명의 풍성에 결핍이 왔으므로 에덴 같이 좋은 것이 없어진 상태이고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 없는 상태이다.
종말의 재창조 때에 하나님도 안식 하시지만 지금은 안식하지 못하신 것을 볼 수 있고, 일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시며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태초의 개념이며 동시에 종말의 개념이다. 첫 창조의 안식일이 없어지고 이제는 사단의 개입하여 어둠과 죽음, 고난과 질병으로 나타난 증상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이런 세력을 물리치시려고 예수님이 일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일하러 오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을 넘어뜨린 사탄의 통치는 인류를 부려먹고 삯으로 사망을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믿게 해서 구원을 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로 교훈하시고 선물로 안식일이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심은 이런 신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방해공작을 해도 변함없이 가르치시고 에덴과 같은 하나님의 통치를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 날 병 고침은 내가 하나님이요 종말에 영원한 안식일이라는 천국을 주시고 그 천국의 통치자로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첫 안식일을 아주 밝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 안식일에는 38년 병자나 문둥병자나 소경이나 어떤 결핍도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시고 진정한 안식 때에 있어야 할 분이 자신이심을 보여준다(전능 자, 곧 하나님, 지금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마지막 종말의 안식일에 보좌에 앉으실 그 이가 예수님인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을 입지 않고 나타나셨으면 유대인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죄(육)을 감당하시려 임마누엘로 육을 입고 오셔서 대속의 피를 흘려 구원해 주셔야 되기 때문에 성육신하셔야 한다. 꼭 필요한 성육신 하나님을 거부함이다(아비의 사주로 육을 따라 생각하며 믿지 않았다).
사단은 우리를 속여서 육신을 충동시켜 죄를 짓게 하고,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하나님같이 되려는 망상 때문에 교만하고 그 교만 자체가 범죄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죄 지으라고 하기보다 육을 충동).
신학이 원시적인 사람은 죄와 고난을 일대 일로 성립시킨다. 하나님께서도 간혹 그렇게 성립도 시키지만 항상 그렇게 섭리하시지 않으신다. 나의 죄와 이웃의 죄 때문에 고난이 온다(연대성이 있음). 그 예로 안전 없이 발파작업을 하다가 찾아 온 재난이나 죽음 등이 그렇고 훼리호의 참사, 항공기 추락과 크고 작은 교통사고, 잘 달리고 있는데 정신없는 무면허자가 사고를 내는 일도 있을 것이다. 자성할 필요는 있으나 무조건적으로 죄와 고난을 일대 일로 생각하여 입원환자를 찾아가서 협박하듯이 회개를 외친다면 위로가 될 수없다.
이 법칙은 자연계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막과 지구 온난화는 아마존 강 주변의 엄청난 벌목으로 사막이 점점 아프리카로 내려와 오늘 기아가 온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냉난방 시설 등이 오존층을 오염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무질서한 세상에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셨고, 그 계시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 되며, 상호 내주(계3:20) 하시므로 조물주 그리고 피조물의 교제 이것이 곧 생명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생명은 곧 영생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영생의 그림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몰아내고 참된 안식을 가져온 것이다.
이 진리를 학문이 없는 소경이 깨eke고 표적하는 것인데 왜 모르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한다.(10). 그래서 선지자로 고백하고(신 18:15,18 모세와 같은 자) "이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지 아니하셨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33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소경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소경이 눈을 뜬 고로 예언된 선지자로 믿었다. 요한복음 9장 35절로 38절의 소경과 예수님의 대화에 39절 유대인이 등장하여 왔으나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유대인들 다시 옴은 소경의 눈을 뜨게 했으니 뭔가가 있기는 있다고 믿었으나 연구 끝에 모세 율법에(안식일을 9:14) 비추어서 거부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자요, 그 율법을 완성 시키려고 오셔서 지금 완성하고 계신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들의 주변과 우리 가정에 출생과 사망이 안식일에도 일어난다. 이는 안식일 날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 하나님이 소경의 눈을 고치신 것이고 바람과 바다도(자연계) 임의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에 엘리야나 모세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너희가 소경이라 했으면 볼 것인데 본다고 하니 소경이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이는 지극히 조그마한 것을 알고 안다고 하니 자만하여 못 본다는 것이다. 그 안다는 것이 나와서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메시야 노릇하는 것으로 보는 자 들의 눈에는 자기주장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오해케 하며 죄로 빠지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요한복음 9장 40절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다.
세례요한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오실이가 누구신가를 예수님께 가서 알아오게 했다.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메시아인가? 아니면 구약 선지자처럼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신 예수님께로 받은 힘으로 사역을 하신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됨을 알려 주셨다. 물론 이 때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해서 보낸 것이 아니다. 자기는 가짜이고 예수님이 진짜인데 자기 옆에(감옥)서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인도한 것이다(요한은 태중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
우리가 전도 할 때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만 박사가 되면 좀 안다는 것 때문에 그대로 받지 않고 자꾸 자기의 지식을 통해 헤아린다. 힘들게 선한 일을 한다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여기 또 다른 부류가 있는데 소경의 부모이다. 이들은 기회주의자다. 결국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는 유대인의 압력에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경은 삶의 방향에 큰 타격을 몰고 올 위협 앞에서도(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출교를 당함)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이교도라는 낙인이 찍어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낙인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자녀를 창조해서 하늘을 뚫고 올라 가셔야 한다. 이는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다가 곧바로 우리 모두에게 권면하신다. "아멘, 아멘 하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계시는 지식을 가져오고 그 지식은 생명을 가져옴).
계시의 빛은 항상 거부 현상이 오고 스스로 거부하는 암흑의 지식임이 드러난다. 이 갈림의 현상은 지식을 거부하고 정죄 받는 것이다. 소경같이 빛을 얻는 자도 있어서 이중 효과가 드러나 정죄되며 암흑 자식의 확인과 구원의 확인으로 드러난다.
제 10장: 선한 목자 예수님
요한복음 9장은 8장 12절의 주석이고 10장 1절로 21절까지는 9장의 주석이다. 요한복음 10장 1절로 21절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으로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교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이라고 하시고 해석하셨다. 스스로 "양의 문이다."라고 하시고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시고(7), "내가 문이니" 예수님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고 드나들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다(9). "나는 선한 목자다" 즉 살아 있으면 안 되니 죽어야 된다(11). 14절에서도 선한 목자는 서로 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 시대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이 하늘에 문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문으로 오셨으니 그 이전에는 문이 없다는 말이다. 문이 있어야 들어가기도 하고 그 후에 선한 목자가 있어야 되는데 목자와 양은 서로가 소통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하늘 문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알아듣기 쉽게 문이라 하시고 문을 통해 들어가듯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확장한다는 말씀은 쓰지 않으셨다).
목자가 우리의 집 문을 열고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불신자 숫자를 체우심이 아니라 구원 받는 숫자를 체우심이다) 예수님만을 통해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통하지 않으면 절도요, 강도요, 삯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의 그림자로는 출애굽으로 가나안에 들어감이다. 성전에 들어가는 조건은 10계명을 지키고 의롭게 살고, 순결한 자, 열심 있는 자 등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을 아빠로 불러야 하고 의가 바리새인 보다 나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기 위해 여러 가지를 원하신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됨이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구에게 달려있나?
곧 예수님께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어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 11절과 14절의 선한목자는 유목민에게 절실한 것이요, 주변에서 목자들을 흔하게 볼 수 있어서 이해가 쉽고 설명이 없어도 되는 교훈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비유하시는 대표적인 것은 왕과 백성, 양떼와 목자,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등이 있으나 그 중에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다.
언약 백성의 목자 되시는 왕은 하나님이신데,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보시기도 하셨다(하나님이 목자이시다).
에스겔 34장에 참 목자와 인간적인 비행에 대한 거짓 목자가 소개되고 이사야 63장 11절에 목자와 스가랴 11장의 삯꾼 목자의 비행을 드러내어 강조하시고 다윗 왕조 위에 두어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라 했는데 양들을 위해 치리한 것이 아니라 양들을 이용했었다. 그래서 다윗을 이은 목자로 오셨다. 다윗 외에 다른 목자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목자가 되지 못했다.
요한복음 10장 15절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 하신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계시해 주셨다. 양들을 잡아먹는 삯꾼과 아주 대조적인 것을 설명하셨다. 본장 16절에서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돌아 올 자가 있음을 예고 하셨다.
삯꾼들이 목자로 군림했으나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삯꾼의 형태(거짓 삯꾼, 착취, 절도, 강도 등)로 나타났고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시니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나고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실현이요 하나님께서 목자 되어 주심이다.
요한복음 10장 38절에서는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셨다. 이는 곧 바로 나를 하나님으로 안 믿어지면 내가 행한 일을 먼저 믿으라 하셨다. 그리고 나면 그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알아서 믿게 되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계신 것만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 믿어진다는 말이다(제 2위의 하나님으로서 2위 1체시오 합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요 10:30).
이 말씀을 듣고 청중들에게 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22절로 42절 까지는 예수께서 자기 계시를 정리 할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신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계시 내용을 요약해 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먼 곳에 그것도 위엄 있게 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자기들 같이 육을 입으신 모습으로 오셔서 계시하시며, 내가 그 이다 하시고, 생명의 물을 주신 분이요 영생 물을 주신 분, 그리고 목자 되신 분으로 말씀하신다. 우리와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분으로 창조주라는 뜻이다(요1:1~2). 이 진리를 유대인들은 받을 수가 없어서 참람 된다(요 10:33).며 자칭 하나님이란 자이기 때문에 돌로 치려했다(하나님을 욕되게 했고 위엄을 떨어뜨렸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이렇게 힘든 중에서도 언제나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는데 믿어 생명 얻는 소수와 거부하는 다수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수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다수는 스스로 예수님의 양떼가 아니라고 자기들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신 세계를 떠나 어둠을 따라가고 선택 자들은 빛으로 들어와 천국의 백성이 된다.
이를 예정론에 붙여서 학생이나 청년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는다. 예정을 태초부터 종말로 보면 무리가 따라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할 때 잘 믿을 줄을 아시고 선택함이 예지 예정인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조건 선택이다. 그리고 예정은 현재형이다. 곧 믿음의 현재에 일어남이지 태초와 종말인 마지막에만 쓰이는 특허로서 예정이 아니다. 하지만 적용은 종말론적으로 함이 좋다. 즉 예수님께서 계시하실 때 그 현장에서 구원이 일어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파된 복음을 들었는데 믿음이 일어나지 않음 자체를 하나님의 예정으로 볼 수 없다. 예정은 태초부터(엡 1:3, 4) 종말까지 포함하고 있으나 계시 때 그 현장에서 현재 일어난 현상이지 그 때 예정이 아니라 태초의 예정인 것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세력은 사탄의 역사이다. 출애굽 때 모세의 이적이 나타날 때에 도술사가 등장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그 결국의 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크게 폐 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영광스럽게 드러난다).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그대로 받지 못하도록 거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구원이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다. 만일 구원을 우리가 한다면 지금 잘 믿어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핍박 때문에 무너지면 어떻게 할까?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안심할 것은 우리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나 공로 등을 첨가 한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속에 예정이 있다고 믿으면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른 예정론은 현재의 믿음이 종말에 구원을 주는 완전한 믿음이라고 구원의 확신을 준다. 성도가 견인 할 수 있도록 확신을 준다. 바울도 로마에서(8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소개할 때 믿음의 덧입힘을 설명하고 구원의 첫 열매를 누리는 것을 보여준다.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라면 핍박이나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신앙으로 승리하게 된다. 이 예정의 교리는 우리에게 확신과 위로를 주는 교리로 예정론의 진리를 펼쳤던 것이지 전도하기 싫어서 예정교리를 도입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믿어지지 않더라도 언제인가 믿게 되었는데 믿고 보니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내가 믿기 전에도 역사했음을 알고 출생 전 이 세상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예정 속에 이미 구원을 받았고, 나를 끝까지 지키셨음을 깨달은 교리를 바울이 증거 한다(하나님은 뜻을 변경치 않으시고 취소하지 않으심). 그러니 예정론을 처음부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죄를 짓고 내가 진짜 예정을 받았나?). 혹은 호기심의 만족을 충족하기 위하여 예정론이 주어짐도 아니다. 요한도 지난날을 뒤돌아보면서 예정론을 말하고 바울도 뒤돌아보면서 예정론을 말했다.
제 11 장: 예수님 자기 계시의 절정
지금까지는 모든 이적들이 하나님을 계시한 자로 예수님을 소개하였고 그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자로 자기계시를 하셨다. 즉 예수님이 위의 세상(천국)의 자체는 아니셨다. 그러나 본장에 와서는 나사로에게 직접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는 성경에서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니까 믿음 생활을 하거나,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용서 받으려 믿는 자들도 있고, 하나님이 아들을(예수) 통해 영광을 받는다고 믿는 자들도 평신 자 가운데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상한 교파 중에는 예수님을 인성으로만 믿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준다니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믿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본문에서 가장 밝게 표적한 나사로 사건에서도 그 반대되는 반응이 다수로 나타났다는 사실과 그 분리현상이 강력하게 나타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부터 10장까지 표적들의 계시가 연결되어 이어오다가 11장에서는 계시의 절정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더 이상 미루시거나 감추지 않으시고 해 같이 밝게 드러내셨다.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를 빼시고 아멘해라 하시며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더니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당신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요11:25, 26)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나는 하나님이란다의 선포이시다.
다른 표적과 같이 아버지가 영광 받도록 살려 주세요(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선포를 요한복음 11장 45절에 보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장 46절에는 바리새인에게 고하는 이도 있었다.
요한복음 11장 47절로 53절에 주를 달아 말하기를 "그 중에 한 사람이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 함 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고 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대표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들을 대속의 제사로 바치게 함으로서 구원이 이루어짐이라고 선포했다. 마치 창세기에 요셉의 형제들이 악을 도모 했으나 하나님은 선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 8절로 9절에서 "이 제혜는 이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 12 장: 입성하신 예수님
(1) 11:55~12:11
(2) 12~19
(3) 20~36
(4) 37~50
요한복음 12장 1절로 11절은 공관 복음과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입성하신 후에 일어나고 요한은 입성하기 전에 일어났다. 요한이 예수님께서 입성 전에 기름 부으심을 유의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적인 왕으로 입성했음을 뚜렷이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8장 34절로 40절의 내용도 메시야가 왕 되심이 큰 사건이었고, 기름부음이 왕 된 것을(물리적인 기름보다 영적기름이 먼저이다) 강조했다.
두 번째로 유의할 사상은 머리에 기름 부음이 아니요(막14장은 머리에 부음)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발에다 의미를 두고 있다. 이는 성령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강조하고픈 것은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이야 말로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 문화에 발이란 장례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메시아적 왕으로 올라가서(정치적인 왕이 아니요 군사적인 왕도 아니다), 죽음으로 장사를 지내며 대속을 통하여 왕 되심을 나타낸다. 이는 성자 하나님의 정체를 소개하여 장례 절차를 강조한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송장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요11:53)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구속의 섭리를 따라 대행했고, 예수님은 장사 절차에 맞추어 발에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장사를 생각하며 비통한 심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이 속을 알지 못한 유다는 도적의 마음으로 마리아를 책망하였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요12:5~6).
요한복음 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하셨다. 요한복음 12장 12절로 19절 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혹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 입성하셨다. 이러한 유래는 하나님의 섭리인데 언젠가부터 이러한 행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세계는 정복자가 입성할 때 길게 마중 나온 환영 인파들을 동원했다(후진국 권력자가 움직일 때 공항에 인파가 몰리는 현상 같은 것). 이는 예수님께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섭리이다(슥9:9). 로마 총독이 지방 도시를 순찰할 때도 유지들이 나와서 환영하여 입성하고 그 후에 이 도시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는 예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에 시작을 알릴 때와 예언의 성취로 입성할 때 많은 환영 인파 속에 이스라엘(영적인 왕)의 왕으로서 모시고 감을 받아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예수님은 정복자처럼 말을 타고 전쟁의 왕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셨다(슥9:9). 우리를 섬기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입성은 이스라엘의 왕임을 밝히 드러내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죄의 명패가 왕의 죄목으로 주어졌다. 여기 왕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요 온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왕으로서 오심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메시아적 행위와 사역임을 제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 중에는 지금도 메시야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전쟁의 왕을 기대했을 것이다. 즉 제 1출애굽 때 애굽과 바로에게 하듯 제 2출애굽을 기다리는 자들은 로마와 가이사 황제를 이기고 개선장군으로 입성할 줄 알았다. 아마도 말을 타고 와서 다윗의 왕조를 건설할 자로 여겼을 것이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혹 정치적인 메시야가 나타나지 않을까 관심이 고조되고 어느 때 인가부터는 간혹 거짓 메시야가 출현하여 민심을 흔들고 그럴 때마다 로마 군대에 시달린 자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인구가 평소에는 5만 명이 거주하지만 유월절 절기에는 20만의 인파가 몰려들어 소요가 일어나므로 병력이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질서를 유지했을 것이다. 이처럼 유월절 절기는 문제가 많아서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큰일 났다고 종교 지도자들은 긴장이 되었다. 문제는 이번에 예수라는 사람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할 것이요, 무식한 백성(가난한자, 병든 자 등)들은 거짓 왕을 세우려고 소요할 것으로 대처했다. 로마군은 메시야 운동을 저지 할 것인데, 이번 거짓 메시야는 많은 사람이 따르므로 나라가 뒤집힐 것 같았고, 긴장이 고조 되다보니 한 사람만 죽으면 온 나라가 조용할 것으로 믿어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요12:19) 여기 좇는 다는 말은 제자가 된다는 전문 용어이다.
모든 이방인의 구원을 예고 함(요 12:20)
이전까지는 헬라인이나 이방인을 말씀하지 않으시다가 여기서 말씀하실 때 사역의 중심이 유대인을 위하여 섬기시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이셨고, 이방인들은 찾아오는 자에게만 한정시켜 구원하신 것을 본다. 주인의 상에서 부스러기 정도를 얻어먹는 것으로 한정 시키셨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5장 8절로 9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록된바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로 정확한 진리를 간략하게 말한다.
예수님이 성취하실 사역을 이렇게 하신 것은 옛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언약성취로 모든 이방인들을 복주시기 위함이었다. 천하 만민이 구원받는 이 뜻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방이 구원 얻는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열방의 구원이라는 것이 죽음이란 것(곧 메시아적 사역)을 통해 완성 하실 것을 예고하시고 그 예고가 눈앞에 당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광 받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아멘)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것은 도덕적인 교훈보다 1차적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25절부터는 제자들에게 적용하시며 섬기는 자라야(제자) 따를 수 있다고 죽음의 순간이 당도 했으므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는 다고 하셨다(28).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는 순간에 높임 받으심이다.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사건이다. 땅 위에서 십자가로 올림 받음이 메시야인 것을 드러내며 인성 예수는 수난을 말하고, 더 깊은 뜻인 하나님이신 것이 밝혀져서 영광 받음이요 이를 믿는 자가 빛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34~36).
* 요한복음 12장 37절로 50절은 공생애에 대한 요약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요약으로 설명하신다. 그 요약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의 형식으로 오셨고 하나님을 계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심판이 없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 절정은 내어줌의 형식으로 정체(하나님이신 사실)를 드러내심이 십자가에 죽으심이요, 영광 받으심이다(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선지자로만 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원죄와 그들이 스스로 범한 죄악들을 용서하시고자 사람의 옷을 입고 계신 메시야인줄 알지 못했다)
여기 영광 받으심은 신적인 하나님이심을 드러냄이다. 이전까지는 말씀으로서 표적을 나타내셨다면 지금은 몸으로 신의 본질을 드러내시게 되었다는 것이다(하나님의 이름인 사랑이 드러나심).
성경에서 두 아들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올 때 몽둥이로 쫓아냄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가 계시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시다면 죄악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니 우리는 소망이 없다. 그런데 그 귀한 사죄의 사실을 온 세상이 밝아지도록 비추어 주셨다.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여 자기주장으로 남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가 지혜롭게 보이고 위대하게 보인 것은 아래 세상에서 하는 원리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내려놓고 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공생의 표적들의 결론인데 그중에 37절로 43절에는 어떻게 표적하고 왜 믿지 않았는가? 의 질문에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 12장 44절로 50절 에서는 마지막 설교로 주셨는데 그 내용은 요한복음 2장에서부터 12장까지를 요약하신 말씀이요 그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제 13 장: 만찬과 새 계명을 주심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까지는 고별사의 내용과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보여 주는 장들이다.
요한복음을 전체를 두 권의 책으로 나누면 1권은 2장부터 12장까지로 공생애 동안 계시하신 구원의 활동을 드러내셨고(표적 -> 해석 ->설교) 제 2권은 13장부터 20장까지로 영광의 책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이 영광의 책들에서는 믿는 소수와 제자들을 자기 백성이라 칭하시고, 믿음이 어리고 불안전 하지만 믿기 시작한 그들에게 계속해서 계시해 주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귀환하시는 모습을 그려 주시고, 오셨던 곳으로 귀환하심이 영광 받으심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귀환하심은 사닥다리를 세워 놓고 올라가심이 아니요 구름타고 두둥실 떠올라감도 아니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본질을 드러내고 승천하심이 영광 받으심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심은 그 사람의 아들(예언한 메시야)로 높임 받아 자기 백성들을 모아들임의 시작으로 보여 주신다. 그리고 또 다른 면의 교육은 대속의 제사인 사랑의 계시이다. 이렇게 아들의 계시로 본질이 드러나(4장)는 순간이요 곧 영광 받음의 순간이다. 즉 요한복음 1장 51절의 약속대로 다시 한번 사람과 하나님을 연합시키는 사건이다(야곱의 꿈).
니고데모에게 야곱의 꿈의 계시를 말 할 때 위에서 나야 영생하고, 그리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는 말을 중생으로 표현하셔서 하나님과 사람 연합을 강조하시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그리스도를 중보삼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다.
여기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은 최후만찬을 보여 주시는데 1절에 "때"는 예수님께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임한 줄 아시고(완성의 때),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남김없이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시며, 믿는 소수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셨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고, 계속해서 최후의 말씀들을 생각하시며 몸이 떡과 피로 말씀하시고, 이렇게 가르쳐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생략하셨다. 세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신학적으로 해석하셨고(6장, 15장, 23장), 교회의 상징인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를 인정만 하셨다.
그렇다면 왜 생략했는가? 세례요한이 무교회주의나 구세군처럼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이 아니다. 아마도 요한은 헬라 사상의 미신 행위(고대 교회가 중세에 이를 때까지 세례와 성찬을 믿음과 동일시함)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으로 보고 또 다른 문제는 연구 과제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곳곳에서 세례와 성찬에 대한 신학이 나타나고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 유월절의 만찬 시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유월절 만찬이다.(니산 15일) 공관 복음은 최후만찬을 15일에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은 하루 전에 만찬을 먹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15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며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양 잡는 시간(성전 뜰에서 도살하는 시간)에 죽게 된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으로 죽은 그 시간이 강조된 것 같다(밤에 잡아 놓고 아침에 먹고 출애굽을 함).
공관 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요한복음과는 하루의 차이가 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쓰셨다는 것으로 보고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일찍 먹되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시간은 15일이 틀림이 없다. 성령님께서 특색 있게 그리고 같은 날로 정확하게 알라는 암시이다.
- 요한복음 식으로 살펴봐도 신학적인 의미가 있고,
- 공관복음 식으로 살펴봐도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 사역들이 제 2의 출애굽이라는 기본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기자들이 서로 다른 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우리나라도 10년만 지나가면 음력이 없어질 것인데 국민에게 선심 쓰는 정치인들이 다시 음력을 찾기 위해 국풍운동으로 제사 차례상을 차리는데 하루 전에 하는 것은 망자가 살아 있을 때의 기준이다).
유대인들의 달력에 대한 문제는 기원전 152년에 예루살렘 성전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했다. 하스모니아 가문에 요나단이 수리아 알렉산드리아 빌라스에게 대제사장의 임명장을 받아(전통적으로 솔로몬 시대부터 내려오던 사독 대제사장이 아닌 이방나라 왕의 임명장을 받음)서 제사하기 때문에 성전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분개한 자들은 전통을 이어받은 제사장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탁월한 선생의 지도력이 중심이 되어 정통적인 제사장과 똑 같은 조직과 의례를 만든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바로 쿰란 공동체다.
이들은 조직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과 결별을 선언하고 암흑의 자식들(그들)과 성전(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 새 성전을 건축한 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뜻을 정하고 그러기 전까지는 없어진 성전이 자기들의 공동체로 보면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독선적으로 나아가자 바리새인까지 이단시 하며 지냈다. 후대에 보니 그들의 달력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리스 정교회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알고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같은 달력을 사용했지만 제 2 출애굽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요한복음이 하루 쯤 앞당겼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요한복음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유월절 양으로 예수님을 그리기 위해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록한 것 같다.
최근에 요한복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로는 정상적인 분위기가 지나가고 위기의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하루 전날 모여서 유월절 성격을 띠면서 만찬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한 자들이 많다.
2절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이 일어날 줄을 아시고 계심을 보여주며 4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예수님의 행동을 볼 수 있다(세족식). 그리고 12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옷을 벗으시고 입으시는 두 곳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옷을 벗으심은 죽음이요, 입으심은 부활이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이 옷을 벗음으로 시작하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셨는데, 곧 죄 씻음이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극적인 면을 보여주며 생명주는 것의 그림자로 나타내셨고, 예수님도 몸짓으로는 내어줌의 형식을 하시고 떡을 부스러뜨리고 잔을 부어 몸이 찢기시고 피 흘리심을 보여 주셨다. 이것으로 충분하지만 해석까지 하시므로 떡의 말씀, 잔의 말씀, 구약의 말씀으로 설명하셨다.
그래서 13장 8절에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음을 말씀하셨다. 여기에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죽고 부활 하신다는 말씀이요 참석자는 혜택을 입고,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 초대 교회 모
+ 말씀 선포= 설 교
+ 성 만 찬= 보여줌
초대교회는 이 두 가지가 있었지만 현재 한국 교회는 나누어 졌고, 엄숙해야 하는 것이 앞선다.
이는 요한복음과 같은 것이다. 요한복음도 말로 선포하고 극적으로 보여주고 한 번 더 설명하셨다. 여기 예수님이 어떻게 씻기시냐? 이사야 53장 5절과 10절은 상함 받고, 찔리시고, 징계 받아 죽는 모습이다. 어린 양으로 죽음이요. 흘리는 피 이다. 여기서도 오해가 발생하는데 이를 구원론적인 범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생이 어떻게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있는 가(6)? 이는 유대 사상이나 헬라사상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자가 발 씻는 것은 모르겠지만 스승이 씻겨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이미 구원의 법칙에서도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했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어도 귀족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는 곧 나의 죽음의 덕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속죄의 의미로 닦아 주셨다.
두 번째로 윤리적인 범주로 겸손과 섬김의 모범이다. 서로 서로에게 머리가 되려고 자기를 주장을 하지 말고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자기 주장하는 것이다. 즉 죄의 본질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이기주의다. 남을 위협해서 강권적으로 섬기게 함이 없어진 곳에는 아가페 사랑이 있다.
씻음이 곧 속죄이다. 새 언약을 통해 나타난 새 계명의 모습이다. 새 언약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새 계명은 서로 사랑, 서로 종노릇으로 내어 주는 형식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안다고 하셨다. 이는 발 씻음으로 나타내 보이셨고 남을 다스리는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극적으로 보여 주셨다. 지금도 남을 다스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구약적인 사고이다. 교회 안의 많은 직분도 섬기라고 주셨고 높은 직분 자는 종이 돼야 한다. 집사님이 어이 이목사라고 부를 때 유쾌하지 않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31절로 14장 31까지는 예수님께서 돌아감을 강조하시고 영광 받음의 순간이라고 하셨다. 이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씀하시고 고난이란 표현대신 영광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내어줌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 어린양으로 바쳐진 것을 계시하신다. 십자가는 사랑의 계시요, 하나님께서 하나님모습을 드러내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과연 하나님이신 것을 인식케 하고 그 거룩함과 사랑하심에 참예할 때 그것이 영광이며, 영광 받음이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조금만 일에도 마음과 행동이 달라진다. 부분적으로 사랑하고,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부분적으로 헌신하며, 유한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만한 믿음을 기대할 수 없다. 위에서 나셨고, 위에서 오셔서 구원해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이 처럼 인간들이 자기들의 결핍을 채우려는 삶이라면 우리 하나님은 충만하시니 채우려고 무엇을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자연까지 착취해서 채우려고 하고, 이웃의 것을 착취하여 채우려 하고, 자연의 가치, 이웃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를 에로스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에로스는 남녀 사랑 외에 이렇게 철학적인 높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지식 탐구도 에로스이며 건강, 성공, 성적인 것, 등 모든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부요케 함의 일체가 에로스이다. 생존 경쟁도 만민이 만민과 투쟁해서 자기주장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갈등을 일으켜 착취하고, 그 결과로 오는 것은 만인이 서로에게 피해가 오고, 자연도 인간에게 도전하여 공해로 복수를 한다. 한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우림을 벌목하여서 사막이 아프리카로 점점 내려왔으며, 굶주림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먹는 양식까지 공해의 쌀과 섬유, 자동차 등도 공해로 오염시키며, 현대 과학은 핵무기의 위험이요, 지혜와 선행까지도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하셨다. 하나님만이 남의 것 무엇을 채우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가페 하신다. 이 아가페 하심이 일반적으로 가치 없는 자들에게 자신의 전능을 주심이다.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을 자기에게 채우려고 한다. 사람끼리도 가진 것 많은 사람이 남에게 줄 수 있다. 없는 자는 자기도 없고 줄 수도 없다. 애들도 부모사랑 받은 자가 사랑하고 안 받은 자는 사랑 할 줄도 모른다고 한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육을 입을 때부터 내어줌의 시작이요 본질이 드러남의 시작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드디어 십자가에서 이루어짐으로 하나님 다운 모습을 보여 주시므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케 되고 십자가는 계시의 완성이 되었다.
제 14장: 제자들을 위로하심.
복음을 단계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하시되 연합과 함께 생명을 얻는다는 그림언어로 아버지께 간다고 하신다. 요한복음 1절에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하시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심은 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2절에서는 처소라는 방들을 만든다는데 그것을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이 때에 도마가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다고 하셨다(5).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버지께로 감이며 길이 되시니 와서 만나고 함께 살게 된다는 것과 나를 보면 아버지를 벌써 본 사람이라는 것이다(요 14:10, 11).
* 하나님, 예수님.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을 연합시키는 단계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안 계신 상태의 하나님이실 것인가? 신 존재 방식이 하나인 상태에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계시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연합하자. 아버지의 사랑으로 시작된 사람의 공동체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과 같이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끝까지 사랑하는 나라이어야 요한복음 15장의 나라 곧 열매를 맺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을 계시하고, 하나님은 아가페를 생산하고, 우리는 그 아가페를 먹고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널리 전파하면서 증거를 삼아야 한다. 순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와서 사랑으로 인도하고, 메시야를 보내시고 사랑으로 구원하심을 증거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인간 냄새가 나는가? 하나님의 냄새가 나는가?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증거 하는가? 사람을 증거 하는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말씀하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한다. 증거 하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사역하심을 우리도 본받아 예수님의 것을 취해서 선포해야 한다(요 16:13, 14). 삼위일체의 관계를 보면 성부님의 것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성령님은 예수님 것을 가지고 가르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는 성령님이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2절로 15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하심은 설교 사역이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요한복음 16장 8절로 11절도 성령님께서 설교사역을 하심을 볼 수 있는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는 것이다. 설교에 이러한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시다. 성령님은 성부님과 성자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수님을 증거 한다. 이는 존재론적인 통일성이다. 아다나시우스의 논쟁이 중요함은 아버지보다 조 금 부족한 예수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조금만 부족하면 계시가 일어나지 못한다. 의지하신 면에서도 같아야 한다. 아들이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아버지 것으로 하심이요 나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속이란 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이 순종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은 객관적인 구원으로서 우리의 의가 없어도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이 되지만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구원이 된다. 누구든지 구원이 적용되면 믿음으로 성령이 역사함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계시하시고 구원을 주신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도 유대인이나 유대인이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은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었다. 일위일체의 신앙으로는 구원도 없고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지 않게 하신다.
수천 년부터 한 분, 한 인격으로만 알고 전수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한 몸이라는 2위 1체라는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고정관념이라 깨어지기 어렵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초월하시고 내재하신다. 크기를 말할 것 같으면 우주보다 크시다. 하늘이 잘못되면 하늘보다 작아서야 어떻게 수리할 것인가?
삼위일체는 내재 초월성을 말씀하시려고 삼위일체를 말씀하신다. 다실 론은 초월성이 없다. 초월성이 없는 곳에서는 자력 구원이요. 고등 종교의 신론도 초월만 있고, 내재성이 없어서 방치하고 계시니 구원하러 오지 않으신다. 이러한 종교도 자력 구원이다. 이상한 종교에서는 금식, 단식, 메카순례, 순교 등을 자력으로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지혜, 실행, 능력을 행하므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초월성이 있고 내재성이 없는 곳에는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지 못한다. 구원은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야 하는데 전능인 초월성과 은혜인 내재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초월과 내재성이시다. 그러나 엉터리 재판관이 죽였으나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일으켰다. 유대교적 숙어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남이요 그 절정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ㄴ질을 드러내실 때 유대교식의 하나님이 아님을 확실히 드러내신 것이다. 이는 제자들도 죽으시고 부활할 때까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다. 다만 제 2위 1체 하나님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비로써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하나님이 오신다고 비유할 때 숨을 내쉬며 성령님을 극적으로 보이신 것 같다. 이 사건이 오순절 성령님 강림으로 삼위일체가 정립되고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완전히 깨어졌다. 여기서 인간의 범주와 개념으로 말 할 때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삼위일체로이 곧 구원의 확신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는 방치하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삼위일체시니 구원이 확실한 것이다. 숫자풀이나 쇠에 불을 붙이면 열 이 나고 빛이 남이나 혹은 한국의 정서로 한, 멋, 삶이나 아빠, 엄마, 나, 또한 꽃, 향, 열매 등은 오해가 발생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계시 종교이다. 계시된 신적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보자는 작업이 조직신학이다. 이 학문은 역사신학을 통해 역사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태초에 천지창조를 하신 분께서 오늘까지 역사에 관여하시고 섭리하시면서 정립시켜주신다.
요한복음 16장에 문제가 있는데 5절에 “지금 내가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는 모순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3장 36절과 14장 5절에 이미 질문을 던졌다. 16장 7절은 예수께서 떠나감이 왜 제자에게 유익한가? 늘 함께 있고 직접 대하기만 하면 믿음이 생겨날 것인가? 16장 17절에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또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만 했는가를 살펴보다.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쉽게 생각하며 살인으로 보지 않았음이 신약성경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행했다. 마카비 핍박에 순교하고 혹은 이단을 척결한 것으로 관점이 다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더럽히고 이방인과 내통이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제물감이다. 참으로 참람 죄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 당당한 유대교의 열성적인 신앙으로 속죄의 제물 감을 삼으려 했다.
보혜사 성령: 교회시대 제자들의 인도자(요 14:15-21)
I. 본문의 배경
1. 문학적 장르
요한복음 14:15-21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13:31-16:33)에 속해 있다. 고별 설교는 문학적 장르로 볼 때 유대교 문헌과 그레꼬-로마 문헌 모두에서 죽어가는 영웅의 이별 장면을 기록한 유언 문학에 속한다. 다만 이것이 그레꼬-로마 문헌에 나오는 유언문학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구약-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유언 문학에 가까운지가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레꼬-로마 문헌 중에는 죽어가는 영웅적 인물로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제자들과의 대화한 것에 대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예로는 죽음을 앞둔 야곱이 제자들에게 유언을 한 것(창 49장), 모세가 백성들에게 행한 유언으로서의 연설(신명기)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약 동시대의 유대교 문헌에는 이러한 유언 장르의 문헌이 많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열 두 족장 각자가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는 형식의 ‘열두 족장의 예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신약 성서 자체에도 이런 문학 장르의 글로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고별 가르침(22:14-38)과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연설(행 20:17-38)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가 위의 내용 중 어떤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에 얼마나 활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요한복음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유대 문헌에 더 익숙해 있었고 최소한 구약적 배경에는 친숙해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여기에 제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것이 구약-유대교 전통보다는 그레꼬-로마 전통의 유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는 기본적으로 구약-유대교의 유언 문학에 속하면서도 축복보다는 ‘위로’에 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별 설교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보혜사를 보내 줄 것에 대한 약속은 예수가 떠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위의 문학 장르와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2. 문학적 구조
예수가 제자들에게 고별하는 장면은 13-17장까지로 볼 수 있지만, 최후의 만찬 장면과 기도를 고별 설교에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예수가 고별 설교하는 것은 13:31-16:33까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4장 마지막 절에서 “일어나자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하고 18:1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편으로 나가시니”라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볼 때 15-17장은 초고가 완성된 후에 첨가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추후에 보충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흔히 고별 설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13:31-혹은 14:1-14:31; 15:1-16:4a; 16:4b-33) 세 층의 고별 설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에서 보혜사 본문 등 반복되는 것이 많음을 볼 때 각각은 예수의 고별 설교에 대한 여러 층이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 층으로 구성된 것이라해도 최종 형태의 본문을 편집자가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은 편집자는 최종 형태의 본문이 문학적으로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별 설교는 여러 층이 있다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본문 자체가 저자의 본래 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사실 요한복음 저자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복이 생소한 것이 아니라 고별 설교에서는 요한복음의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반복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또 보혜사에 대한 본문에서도 반복이 있지만 각각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설혹 고별 설교가 처음에 14장까지 완성되어 나중에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형태의 본문도 그 안에서 통일성 있는 문학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우리가 분석하려고 하는 본문인 14:15-21은 예수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위로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베드로에 대한 위로로 시작해서(13:31-38), 제자들 일반에게 주어진 위로(14:1-14), 보혜사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한 것에 대한 위로(14:15-26), 평안의 약속을 통한 위로(14:27-31)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울서신의 논리 전개 방법과는 달리 요한 서신은 문단이 사상 단위 별로 명확히 끊어지지 않는데, 요한복음 14장도 요한서신과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 예수의 떠나감에 해결을 위로로서 한다는 주제로 묶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II. 본문 주석
1. 예수를 사랑하는 것,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제자도의 기본이다(15, 21절)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가야-죽어야- 할 것을 말한다(13:33).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지만 예수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듯이(마 16:13-20; 막 8:27-30; 눅 9:18-21) 요한복음 고별설교에서의 베드로 또한 예수가 자기들을 떠나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 되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베드로는 예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따라가겠다고 공언하지만(13:37) 예수는 오히려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한다(13:38). 도마도 예수가 가는 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떻게 알겠삽나이까?”(14:5). 빌립 또한 예수를 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다(14:8).
본문은 바로 예수가 제자들을 떠나간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근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위로로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예수의 위로는 한마디로, 자신이 떠나가면 자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것과(16-17절) 자신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겠다는 것이다(18-20절).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앞뒤에 제자들에 의한 예수 사랑이하는 주제가 등장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절) 사실 이 구절들이 앞 뒤 절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14장 1-14절에서 예수의 떠나감에 대해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반복되어 언급되듯이, 15-24절에서는 이것이 예수 사랑이라는 주제로 계속해서 기술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비록 앞 뒤 구절과는 직접적인 연결점은 없을지라도 보다 넓은 문맥에서 예수 사랑은 예수의 약속을 받는 제자들의 기본 태도로서 잘 연결되는 주제인 것이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사랑이 주요 주제이기는 하지만 제자들(혹은 신자들)에 의한 예수 사랑이라는 주제는 드물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주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의(혹은 예수의) 신자에 대한 사랑, 혹은 제자들 간의 서로 사랑이다. 요한문헌에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예수 사역의 결과로 제자들에게 명령된 것이 서로 사랑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것들이 더 자주 언급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제가 요한 신학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주제는 요한일서에 병행문구로 나타나며(요일 5:3), 예수를 알고 그를 믿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주제라는 것은 요한서신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이다(요일 2:3-5; 3:24; 요이 9).
흥미롭게도 21절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여 15절에서 말한 것의 주어와 보어의 내용을 바꾸어 말하고 있다. 즉 여기서 예수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를 신앙하는데 있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절에서는 이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제자들에게 이것이 명령되었다면, 21절에서는 3인칭 단수로 표현되어 보다 일반적인 진리 형태로 이것이 표현되어 있다. 21절에 한 가지 추가된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이다(cf. 16:27). 이 구절은 통해 예수는 제자들의 예수 사랑이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하나의 표시로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의 떠나감(죽음)이 아무 걱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예수가 떠나가면 보혜사가 올 것이다(16-17절)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들의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예수의 약속이다(16-17절). 이 구절은 예수가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일어난 불안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주어진 것이다(13:33). 우선 예수는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다(13:34-35). 그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를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한다. 베드로조차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예언하자 그들의 불안은 증가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영원히 거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약속한 것도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14:1-3). 제자들과 부활 후의 요한 공동체에게 급박하게 요구된 것은 죽은 후 하늘의 어떤 장소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재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와 같은 한 인격체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수가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은 “제 2의 보혜사”(a;llon para,klhton)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보혜사는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이 시점까지 예수가 제자들의 보혜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요한일서 2:1에서 예수를 보혜사로 호칭한 것도 이곳에서 예수가 본래의 보혜사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보혜사의 기능들-제자들과 함께함, 가르침, 증거 등-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기능이었음을 볼 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라는 것이 더 명확해 진다.
본래 보혜사인 예수의 역할이 제자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것(6:66), 즉 제자들과 삶을 같이하면서 제자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듯이 이제 새로운 보혜사의 역할도 예수가 떠나간 상황에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meqV u`mw/n eivj to.n aivw/na h=|)것이다(16절). 보혜사가 제자들과 함께함은 다음 구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parV u`mi/n me,nei kai. evn u`mi/n e;stai). 고별 강화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보혜사의 기능은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함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에서 근원한 것이다. 함께함에 의해 보혜사는 제자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14:17), 예수의 본질을 계시하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14:25-26), 예수를 증거하고(15:26), 세상을 책망하고(16:8-11) 이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16:13).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과 “잠시 동안”(13:13) 머무르는 반면, 보혜사는 이들과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영원히”라기보다는(cf. 4:38; 8:35; 12:34; 13:8) 보혜사가 제자들과 머무르는 시간이 예수의 지상 사역의 기간보다 더 오래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시간은 다름 아닌 교회 시대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떠날 것을 예고하면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는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들과 함께 있을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내 주기로 약속한 보혜사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 우선, 신약성서에서 헬라어 para,klhtoj라는 단어는 요한문헌에서만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원적, 종교사적으로 그 정확한 뜻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로 “보혜사”로 번역된 para,klhtoj는 신약 성서이외의 문헌에서는 주로 법정에서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16:7-11에서는 이것이 법정에서의 역할과 연관되어 쓰인 것이 분명하지만-비록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피고를 고소하는 역할이기는 하지만-다른 구절에서는 이것이 분명치 않다. 어형론으로 볼 때 이 단어가 수동형 부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어떤 일을 돕기 위해 옆에 불리워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단어의 뜻이 수동적인 역할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로서 조언자, 위로하는 자, 중보자, 대변자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쓰인 보혜사는 위의 어느 뜻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을 고소하는 검사의 역할로 쓰였지만(16:7-11) 제자들의 변호사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혜사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 인격체인가 하는 것은 그 어원이나 명확하지 않은 종교사적 기원에서보다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각 구절에서 그 쓰임새를 통해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보혜사 본문에서 보혜사는 “진리의 영”(14:17; 15:26; 16:13)이며 “성령”(14:26)으로 소개된다. 보혜사가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예수가 진리(14:6)라는 요한복음 예수의 자기 천명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명칭을 기독론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14:17에서 보혜사가 처음으로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인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황에서 말해진 것이다. 이 언어는 거짓의 영의 지배를 받는 세상과 대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세상은 보혜사를 영접할 수 없다. 여기서 쓰인 “영접하다”(labei/n)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믿다”(pisteu,w)와 상응하는 용어이다(cf. 1:12). 세상은 보혜사를 받아들이지도 어떤 인격적 관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는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 없는 것은 보혜사가 영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은 보혜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cf. 9: 39-41; 12:45).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여기에서 쓰인 “본다”(qewrei/)가 “안다”(ginw,skei)라는 말과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임을 볼 때, 세상과는 달리 제자 무리는 보혜사를 알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17절).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제자들이 세상과는 달리 보혜사를 알고 있는 것은 보혜사가 제자들 가운데 머무르고 함께 있다는데 있다고 한 것이다. 즉 제자들은 제자 무리 속에 거하는 보혜사를 체험함을 통해서 보혜사를 알게 된 반면, 세상은 보혜사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혜사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도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성령이 바로 구원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1:22; 5:5).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현재 읽고 있는 요한 공동체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성령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보혜사가 제자 무리 속에 현존하겠다는 약속에 해당하는 동사인 me,nw와 e;imi가 사본에 따라 현재형과 미래형이 각각 다 나타나는 것도 이것이 요한 공동체의 현재적 성령체험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3.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날 것이다(18-20절)
예수가 떠나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또 하나의 조치는 예수가 이들에게 부활 후 다시 나타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예수는 자기가 죽으면 부활해서 다시 나타날 것인데 세상은 부활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제자 무리는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19a절).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19절의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evgw. zw/ kai. u`mei/j zh,sete)가 문제된다. 우선, 이것이 예수가 부활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내가 살았고”라는 현재형 보다 “내가 살겠고”라는 미래형이 더 어울려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미래형 대신 현재형으로 이것을 표현한 것인가? 둘째, 만약 예수의 말로 “내가 살았고”라고 표현한 것이 정당하다면, 그 뒤의 제자들에 대한 것도 “너희가 살았고”라고 표현해도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강조되어 온 것은 생명이 현재에도 벌써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렇게 현재형(zw/)과 미래형(zh,sete)을 병렬시켰을까? 우선, 이렇게 현재형과 미래형이 병렬되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도 나타난 것으로서 요한 문헌에서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me,nei와 e;stai). 요한복음 저자에게 있어 영생은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때로 한 문장에서 같이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생명을 얻는 것은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이 생명을 얻는 것을 미래형으로 표현한 것은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예수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에까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제자들은 생명의 원천인 예수에게 생명을 부여받아 영생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통해 그것을 완전히 부여하는 사건인 예수의 성령 수여 사건(20:22)이 미래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살아날 것(영생을 얻을 것)을 미래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본 절의 문맥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약속한 것임을 통해서 이러한 것을 더 명확히 확인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부활 후 결국 생명을 소유하게 된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 안에, 신자가 예수 안에, 예수가 신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20절). 20절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러 내제 문구들로서 예수와 하나님 혹은 신자와 예수의 합일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로서 상호 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요, 그 결과로 신자와 하나님(혹은 예수)과도 이러한 내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III. 본문 해석과 메시지
1. 해석
요한복음 14:15-21은 예수가 떠나간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가 보혜사를 보내 줄 것과 자신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을 말한 것이 주 내용이다. 거기에 제자도의 기본으로서 예수 사랑도 언급되어 있다. 고별 설교 전체로 볼 때 예수의 떠나감에 대한 대안은 한 가지, 즉 예수가 제자들을 위한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어가는 영웅이 자신의 사후에 제자들이 따라야 할 교훈과 할 일에 대해서 만 언급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예수는 부활할 것이고,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와 같은 기능을 하는 보혜사를 보내 줄 것이라는 약속은 일반 유언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가 떠나는 문제에 대해서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재림할 것에 대해서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해결 하는 반면(cf. 마 24:1-44; 막 13:1-37; 눅 21:5-33), 요한복음은 주로 보혜사에 대한 약속으로 해결한다(요 14:15-16, 25-26; 15:26-27; 16:7-11, 12-15). 이렇게 보혜사 성령이 교회 시대 제자들의 인도자로서 자리매김 한다는 것은 고별 설교에서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고,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약속으로 끝난 것도 아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예수는 예수가 영광 받은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7:37-39). 이러한 약속이 보다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고별 설교에서이다(14:15-16, 25-26; 15:26-27; 16:7-11, 12-15). 학자들은 이렇게 보혜사 본문이 반복된 것을 고별 설교에 여러 버전(versions)이 있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이렇게 보혜사에 대한 약속이 반복된 것은 교회 시대에 있어 제자들에게 보혜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예수는 부활 후, 즉 영광을 받은 후에 제자들에게 위와 같이 보내주기로 약속된 보혜사 “성령을 받으라.”(la,bete pneu/ma a[gion)고 한다(20:22). 그 동안 이러한 예수의 선언이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의견이 있어왔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배격당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선언은 새 시대에 새 창조로서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히 상징적인 행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에서 (새) 창조에 사용된 단어인 evmfusa,w를 사용하여(cf. 창 2:7; 겔 37:9-10) 이 사건이 성령을 통한 새 창조의 사건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예수의 선언은 고별 설교에 예언된 보혜사 성령 오심 사건이 아니라 7:37-39에 약속한 성령 체험 사건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보혜사에 대한 약속은 오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성령 강림 사건을 조화시키려는 것이지 요한복음 저자가 의도에서는 벗어난 해석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신자들의 성령의 체험과 보혜사의 강림은 같은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예수 부활 후 이루어진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떠난 상황에서 제자들의 유일하고 영원한 지도자는 보혜사 성령이다. 요한문헌인 요한일서의 저자는 제자들이 인간 교사를 의지할 필요가 없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제자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2:20, 27).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 상황에서 제자들의 인도자요 보호자인 것이다. 고별 설교에 나타난 보혜사의 기능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보혜사는 제자 공동체에 거한다(14:17).
2)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14:26).
3) 보혜사는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한다(15:26).
4) 보혜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깨닫게 한다(16:7-11).
5) 보혜사는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16:13).
6) 보혜사는 예수께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제자들에게 알린다(16:13).
7) 보혜사는 예수의 영광을 나타낸다(16:14).
8) 보혜사는 예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려준다(16:15).
2. 오늘을 위한 숙고
예수가 교회 시대에 보내 주기고 약속한 보혜사 성령에 대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요한에 따르면 교회 시대는 보혜사 성령의 시대다. 성령은 교회의 성령인 것이다. 이 시대에 신자는 보혜사 성령과의 올바른 관계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여(요 15:26; 16:14), 사람이 신자가 되는 것도 성령의 역할이고(요 3:5), 신자로서 예수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이고(요 14:26. 16:7-11),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이도 성령이다(16:13, 13). 성령은 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지상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했던 역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시대를 사는 신자들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신자의 모든 발걸음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위와 같이 중요한 보혜사 성령과 우리 신자가 얼마나 관계하여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교회 시대에는 자신의 말씀이 문서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의 원리대로만 살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보혜사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보혜사가 자신의 말씀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한다(14:26). 여기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잊고 있었던 것을 갑자기 기억나게 한다는 것 이상이다. 이것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있다고 그 본래의 뜻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cf. 요 2:22).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보혜사는 예수의 말-현재는 기록된 말-을 벗어난 것을 가르치지 않고 그 말의 뜻을 올바로 살피도록 신자를 인도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중시하는 사람은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말씀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에게 있어 말씀 중심의 신자와 성령 중심의 신자가 나뉘어 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요한복음 저자는 우리에게 성령의 도움 없이 말씀의 깨달음이 없고,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한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