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믿음은 절대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믿음은 절대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믿음은 진리를 머리로 깨닫고
진리를 관념 속에 머물게 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순종) 같은 동행지수를 나타냅니다.
믿음은 삶의 열매와 같은 동행지수를 나타냅니다.
믿음은 강권적인 역사로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삶으로 풀어나가며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신앙을 나타냅니다.
진리에 대한 극적인 깨달음이
지적 유희로 종결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실제화입니다.
실상과 실제화는 관념이나 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세계에 반드시 순종으로 드러나는 실상입니다.
믿음은 머리에 머무는 관념이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며 어둠을 향해 뿜어대는 역동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믿음은 삶의 거룩함으로 나타나는 역동적인 권능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지적 즐거움이 아닙니다.
지적 유희
하나님의 찢기심과 피 흘리심이
바로 나의 죄악과 허물임을 깨닫습니다.
강력한 말씀의 빛이 나의 양심을 찌릅니다.
계시의 영역을 열어주셔서
내가 바로 죄악 덩어리임을 보게 하십니다.
이런 말씀의 빛 앞에 정녕 돌이켜 회개하게 됩니다.
거듭남은 기적입니다.
거듭남은 전 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동반하게 됩니다.
허나 이러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
본인의 필요와 자유의지로 거룩한 삶을 거부합니다.
강권적 역사로 거듭남을 얻었을지라도,
그 말씀의 빛에 순종치 아니합니다.
계시적인 빛이 온 존재를 덮고 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합니다.
거룩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정녕 회개치 아니합니다.
세상 탐심과 소욕에 따라 자기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결단코 회개치 아니함으로
믿음이 허상,
즉 지적 유희로 끝나게 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나의 영혼이 날마다 죽어가지만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착각합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바라보며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애써 지워버립니다.
믿음이 허상과 관념으로 머뭅니다.
믿음이 지적 유희로 끝나게 됩니다.
"오직 밖에 던져저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응합니다.
행위 구원론
밑바닥에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종교성을 가지고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구원론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만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구원론과는 전혀 다른 이단사상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여 정상적으로 좁은 문을 통과하여
즉,
거듭남, 칭의, 중생,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마땅히 좁은 길(회개, 거룩, 영의성장, 영혼의 깨어남)을
걸어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한 목회자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행위 구원론자라고 매도합니다.
좁은 문(칭의, 거듭남, 중생, 새생명)에 들어간 자는
마땅히 좁은 길(회개, 거룩, 영적성장, 영의 깨어남)을 가야 합니다.
허나 그 좁은 길을 벗어나서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심판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받으시 순종 동반되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지적 유희로 끝나버린 관념으로
결단코 전진할 수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좁은 길은 순종이 수반되는 믿음으로만
걸어나갈수 있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결론
믿음이 일회성 깨달음,
즉 지적 유희로 끝나는 사람은
밖에 던져저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습니다.
믿음은 지금 내가 두발로 딛고 있는 자리에서,
마땅히 이루어나가야 할일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순종으로 이루어 나가는 체험적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체득한 깨달음을 거창한 관념과
지적 유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함(순종)으로 풀어나가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향한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