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참 신앙은 외적 표지를 의존함이 아니라, 생명으로 사는 것에 있다(롬 4:9-12)
1. 오늘의 말씀 : 롬 4:9-12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이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내 속 깊은 곳에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무엇이나 된 듯 한 착각 속에서 유혹의 소리에 반응하려 하나이다.
주여! 복음을 전하며 맹수와 싸우는 싸움은 오직 십자가 죽음으로만 감당합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몸을 제어하지 못하니 영혼까지 혼미하나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일으켜 주옵소서. 내 영혼도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옵소서.
내 영혼이 편히 쉴 곳, 아들을 힘입어 들어가는 내 아버지 집이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유대인의 믿음을 철저히 분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는 구약성경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것을 이미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써 성취되었다.
이어서 4장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증거를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증거된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다(창 15:5-6).
그리고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만일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위로 된 것이라면 결코 은혜가 될 수 없고 그 자신이 받는 보상일 뿐이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에 속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거저주신 은혜로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윗 역시 불경건한 자리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것을 진정한 복, 행복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은 모두 할례 받은 유대인에 속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행복이 할례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시점이 할례를 받기 이전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무할례자와 할례자를 동시에 아우르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축복은 (오직) 할례 받은 자에게만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할례자에게도 있는 것이냐?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인용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 할례받은 상태에서인가? 아니면 할례 받지 아니한 때인가?
할례 받은 때가 아니라 할례 받지 않은 때이다.
그는 “할례의 표”를 차라리 할례 받지 않은 때에 믿음의 의를 확인하는 표로 받았다.
이것은 그가 할례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자들이 조상이 되어서, 그들의 의가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할례에 속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 받지 않은 때에 확증된 믿음의 발자취까지도 따라가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창 15:6),
그리고 그 후로부터 약 14년후에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받았다(창 17:24,26).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창 17:24).
바울에게 있어 아브라함의 할례는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증하고 정당화시키는 표이다.
이것은 할례를 통하여 확인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보아도 아브라함은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나중에 그 표로써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함을 얻은 것과 같이 의를 얻기 위하여 먼저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먼저 ‘유대교’로 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할례 받지 않았을 때의 믿음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불경한 자를 의롭다하는 믿음이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그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있어서도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육신적 조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1절), 그리스도 이후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구약시대 아브라함은 자손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다.
이 자손은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제 신약시대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행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곧 그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손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믿음은, 이제 아들의 죽음(그리고 장사됨)과 부활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믿음을 표상한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3-25).
신약시대에 있어 ‘세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표지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믿음이며, 표지로써 세례는 부수적이다.
이에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 부활에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한하여 표지로서 주어졌다.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세례는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씻는다는 견해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3세기 들어서 세례는 정화뿐 아니라 입교, 영원한 생명으로의 탄생을 의미하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한편 현대교회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로 주어지는 데, 본질상 모호하기에 이를 데 없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분명한 증거가 없이도 교리에 대한 동의만으로 세례를 주기 때문이다.
신약시대 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정확히 듣고 믿음으로써 비로소 참 신앙에 이르게 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비본 질에 해당되며 세례까지도 참 신앙을 확증하는 표지일 뿐이다.
유대인이 할례에 의존해서 안되었듯이,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신앙의 표지에 의존해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는가?’ ‘날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삶을 사는가?’이것만이 중요하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4. 나의 묵상
나는 대형교회를 다니면서 세례 받은 것을 매우 긍지로 여겼다.
나는 정확한 복음을 듣지도 못했으며 다만 세례문답시간에 형식적으로 주어진 질문에 ‘예’라고 했을 뿐이었다.
이후로 공적인 세례교인으로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집사의 직분도 받고, 성가대 봉사도 하고, 교회 재정도 보고, 여러 가지 일을 겸하여 하였다.
내게 덕지덕지 붙은 표지들은 마치 내가 좋은 신앙을 가진 것처럼 오인하게 하였다.
복음을 들음으로써 나는 참 신앙에는 무지한 채 내용이 부재한 외적 표지만을 중시하였다.
그러한 표지들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일의 지경을 넓혀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높은 지위를 표지로 받기도 하였다.
총무, 겸임교수, 소장...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거짓신앙의 탑이 점점 하늘높이 쌓여졌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내고자 탑을 건설하던 자를 엄중히 심판하셨다.
교회도 흩어지게 하시고 기관에서도 내어쫓김을 당하게 하시고 광야로 나갔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신실하시다.
그곳에서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나의 허물과 죄악과 어둠을 다 드러내셨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떠는 자 되어 죽음을 받아들였다.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이 죽음을 받아들이자, 천상에서 ‘구원이 임하였다’는 음성이 들렸다.
나 또한 죽음을 받아들인 그 자리에 생명의 소리가 들렸다.
나의 죄로 인해 무덤에 들어간 자, 생명의 목자가 거기에 계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영으로 깨닫고 생명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되었다.
열흘간의 농장 일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몸이 고단하여 오전 내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의 긍휼을 힘입어 오후에 들어 말씀 앞에 나왔다.
참 신앙의 본질에 무지한 채 외적 표지로만 신앙생활 해온 이전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멸치 아니하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 듯 밀려온다.
그러면서 여전히 외적 표지에 머문 채 신앙생활 하는 많은 이들이 생각난다.
그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해 낙심이 된다.
그러나 소망이 있음은, 나 같은 자에게도 오래 참으셔서 생명으로 이끄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지 않으시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힘을 다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신앙의 본질에 무지한 채 외적 표지에 매달렸습니다.
큰 교회, 유명한 목사에게 세례 받은 것을 자랑삼았습니다.
이후로 그 큰 교회에서 주도적으로 봉사하고 인정받는 것을 자긍하였습니다.
오로지 외적 표지를 목적으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지한 중에 열심을 내어 광신에 이른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오래 참으신 주께서 마침내 진리대로 심판하셨습니다.
비록 상황은 무덤이었으나 빛이 비추었나이다. 소경된 자의 눈을 여셨나이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날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날마다 생명으로 살게 하셨나이다.
당신의 자비와 긍휼은 진실로 무궁하나이다.
오, 아버지...
눈을 뜨고 보니 눈먼 자의 참상이 보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는 것은 미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눈먼 자의 열심은 광신에 다름 아니옵니다.
하오나 제게 대하여 오래 참으신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기억합니다.
저들에게도 오래 참으사 저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모든 기회를 다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하오니, 주여 역사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