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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전도운동
웨슬리의 생애와 사역
시대적 상황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과학적 발전의 시기였다. 특히 종교와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합리주의 사상은 이신론(Deism)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자연선교가 교회를 지배하였는데, 이신론은 계시를 부인 하면서 종교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성이야 마로 인간의 궁극적인 인도자이며 이성이 곧 믿음이라고 주장하며, 복음도 이성을 앞서지는 못한다고 말하며 성서를 가치없는 책으로 간주했다.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영국교회는 자연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고, 교회의 강단은 이론적이고 배타적인 해석을 일삼는 논쟁터로 화하고 말았다. 또한 대학도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대화의 광장이었고, 교회의 교인은 많았으나 대부분의 명목상의 교인으로서 교회 출석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였던 크롬웰의 전제정치 이후 온 국민은 종교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결국은 종교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회의 부패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당시의 영국의 종교와 도덕은 말할 수 없는 침체상태에 놓여 있었다.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실업자들은 이신론(Deism)의 기풍 속에서 전통에 의한 순결과 정절의 미덕을 냉소했으며, 원양무역으로 값싸게 제조된 술로 흥분을 일으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또 음주량은 영국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문맹은 넘치고, 하층계급의 정신도 퇴폐일색이었고, 오락은 더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초기 생애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의 링컨셔(Lincolnshire)의 가난한 목사로서 38년간이나 목회를 하고 있던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성서에 기반을 두고 규율, 습관, 복종을 주제로 하여 엄격하게 자녀를 양육한 어머니 수잔나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규칙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특히 그의 나이 6세때 목사관의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은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전도자가 되게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1714년 차터 하우스 학교에 입학한 그는 가정에서 배운 교육을 학교생활에서 실습하려고 노력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에 힘쓰면서 자신이 정한 3가지 목표, 즉 불량한 사람이 되지 말 것, 종교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호의를 가질 것, 성경읽고 기도하며 교회에 출석할 것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며 차터 하우스의 시절을 보냈다.
신성 클럽
1720년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한 그는 공부하면서 보다 철저히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1725년 그가 성직 안수(聖職 按手)를 받고 그 학교의 특별연구원으로 있을 때, 동생 찰스 웨슬리(Chrles Wesley)와 친구들과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빈민굴과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구제와 전도활동을 폈고 성경공부에 전념하였다. 후에 이 모임은 그들이 규칙적인 일과를 작성하여 실행함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규범주의자들(Methodist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북미주 선교사
1734년부터 1738년까지의 기간의 대부분을 그는 북미주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2년 4개월동안의 북미주에서의 활동은 성결의 체험없이 자신의 인간적인 열심만 가지고 일하였던 까닭에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미주에서 선교활동의 실패를 통하여 웨슬리는 성결의 체험없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교의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몸소 경험하였고, 북미(北美)에서 선교 실패는 훗날 올더스게잇에서의 성결을 경험하는데 하나의 내적 요인이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북미선교의 실패로 영적인 고민과 좌절에 빠져있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의 집회에서 성결의 체험을 함으로 인하여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 놀라운 체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의 전도활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의 신학사상은 이론적인 면에서 실제적인 면으로 체계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전도활동의 특징은 오직 생동하는 산 신앙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며, 시종일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적이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왔음을 강조하였다.
전 세계는 나의 교구
그는 전 세계를 자기의 교구(敎區)로 알고 빈민과 벽촌을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영국사람들은 회개하며 신앙의 부흥과 양심의 재생을 맛보게 되었다.
웨슬리의 설교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역설하며, 단지 신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고 외쳤다. 그는 신생(新生)과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말했다. 이같은 웨슬리의 사상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영향 속에서 성숙한 것이었다.
웨슬리의 전도활동이 그의 성결 체험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오늘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는데, 곧 선교는 선교사 자신의 구원의 확신과 함께 성결의 체험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사가 성결의 은혜 위에 서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며 이런 감격으로부터 선교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나오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90년 10월 7일 최후의 설교를 하기까지 51년간 옥외설교를 하였으며 하루평균 90마일 이상을 마상에서 보냈으며 일주일에 평균 15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51년간의 전도활동에 있어서 그는 42,400회의 설교를 하였고 250,000마일의 긴 전도여행을 하였다. 웨슬리의 복음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설교가중에 한 사람이었던 웨슬리의 설교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죄악된 생활에서 나와 마음과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웨슬리의 사회를 향한 사역
인간의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부패한 사회 속에서 희생 당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던 웨슬리는 다양한 사회사업을 통해서 그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파운드리의 교회를 편물공장으로 만들어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파운드리, 브리스톨, 웨스트 스트리트 등에 의료원을 설치하여 병자들을 돌보았다. 또한 교회에 빈민학교를 설립하여 무산 아동들의 교육울 맡았으며, 가정구조회를 설립, 의류나 음식을 수집하여 이들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근면한 빈민자들을 위하여 빈민은행을 설치하여 그들에게 저리로 대부해 주어 그들의 생업을 도와 주었으며 서점도 경영하였는데, 이 서점의 이익금은 모도 전도비로 충당되었다.
이 이외에도 웨슬리는 교도소 방문을 정기적으로 하였으며, 노예제도 반대운동과 금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웨슬리는 모라비안 학교 방문의 영향으로 New House라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뉴케슬에는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다방면에 걸쳐 사회사업을 통하여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은 비단 개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부패한 영국사회를 갱신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많은 면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새로운 이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메도디스트의 분열
그러나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Methodists) 운동의 한 주역을 담당하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의 결별은 감리교의 분열을 낳게 해 주었다. 웨슬리는 칼빈의 절대예정론을 부인했으나, 휫필드는 웨슬리의 소위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 감리교에는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알미나인주의를 쫒는 웨슬리안(Wesleyan) 감리교요, 또 하나는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이다.
--------------------------------------------전도를 위한 메도디스트 조직
순회 전도 집회
영국 국교회가 웨슬리에게 강단을 빌려 주기를 거부하자 웨슬리는 동료인 조지 휫필드처럼 야외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영국 교회가 합리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웨슬리는 이를 비판하며 '성서적인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영국교회를 비판하고 공박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강단에서 쫒겨난 웨슬리는 휫필드의 옥외설교가 예상외의 효과를 거두는 것과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가장 유력한 야외 설교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여 옥외 설교를 통한 순회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처음에는 이방법을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찬동하여 이에 협력하였다.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와 찰스 웨슬리 이 세 사람의 전도방법은 당시 깊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영국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1739년부터 5년간에 걸친 웨슬리의 순회전도는 군대편제를 이용하여 런던에 주요 본부를 두고 4인의 목사와 45인의 평신도로 구성된 순회전도단을 운용하였다. 영국 전역을 3등분 하여 구역별로 활동하였다.
조직적인 전도 활동
웨슬리의 동역자이며 불을 토하는 듯한 웅변적 설교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휫필드는 웨슬리의 조직적인 전도활동을 평가하기를 "나의 형제 웨슬리는 지혜롭게 일하였다. 그는 전도하여 얻은 사람을 신도회에 가입케 하여 그 활동의 결과를 보전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방법을 경시했기에 내가 얻은 신도들은 마치 모래로 꼬아 놓은 새끼 같았다"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뛰어난 교회 정치가였고 조직체를 구성하고 관리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가 조직체를 구성한 목적은 가 신도와 또는 신도회(信徒會)가 각각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락 관계를 맺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는데 있었으며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교파를 세우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제 웨슬리가 조직한 몇가지 조직체를 알아 보기로 한다.
신도회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점차로 확장되고 신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에서 사용하던 신도회(United Society)제도와 또는 모라비안들이 사용하던 간친회 제도의 채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전도운동에 있어서 조직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39년의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매주 한번씩 모이기를 원하는 여자 3명과 남자4명의 신도로 한 회를 조직하여 그들이 서로 신앙의 향상과 친목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단체가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은 몇 개월 뒤의 일로 이 사실은 1743년 발간된 연합신도회(聯合信徒會) 총칙 서문에 포함되어 있다. 1739년 말경 자기의 죄를 깨닫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8-9명의 신자가 웨슬리를 찾아와 무슨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 이로 매우 중시하여 심사숙고한 후 매주 1차 목요일 저녁마다 모여 그들과 신가입자들에게 적절한 교훈을 하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단체를 만드니 이것이 런던과 그 밖의 지역에서 조직된 연합신도회의 시작이다. 그후 귿르은 각 회원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 각 가정을 방문하였던 덧이니 이 신도회의 조직이 조직적인 감리회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속회
이와 같은 신도회가 조직 되었으나 인원수가 너무 많아 신도들의 실정 파악과 지도가 어렵게 되자 이 신도회를 다시 작은 단위로 갈라 그들을 보살피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속회(class meeting)이다.
웨슬리는 이 속회의 창설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신도회의 회원이 각처에 흩어져 있으므로 나 혼자서 그들의 신앙상태와 실정을 보살피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몇몇 열심 있고 사려 깊은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 한 유력한 방법을 발견하였다." 고 하였다.
이 속회 제도를 처음 사용한 것은 1742년 브리스톨에서였으며 이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씩을 두어 각 속회를 지도, 감독하게 하였다.
속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각 속회의 지도자들은 그 속의 모든 회원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였으나 이 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매주 한번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북돋아주며 또한 책임자가 기부금을 그속의 회원들로부터 거두어 가난한 자를 돕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속장을 철저히 교육 시키기 위하여 1742년부터 회원증을 발부하여 매주 화요일 마다 교육시켰고 이 회원증은 3개월마다 교부하였다.
그리고 신도들의 양육을 위하여 몇 가지의 모임이 있었다. 야성회는 매월 만월되는 금요일 저녁에 모여 자정될 때까지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상고하는 모임이었고 간증기도회(Intercession-days)는 신도들이 먼저 특별히 정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한 후 모인 자들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으며 애찬회(Love-feats)는 일종의 친목기관으로 계절마다 모였는데 먼저 남자들이 모였고 다음 여자들이 모여 서로 만나서 떡과 물을 마시면서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또 간증문 쓰기(Letter-day)라는 모임은 속회 때 가자의 영적부흥의 체험담을 글로 쓰게 하여 이를 읽게하는 방법으로 이일은 부흥운동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연회
신도회가 조직된지 5년 후 1744년 제1회 교역자회의가 런던의 파운드리 예배당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제도화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회원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 모인 사람은 웨슬리 형제를 비롯한 목사6명과 평신도 4명이었는데 이 회의가 감리교회 최초의 연회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신도들에게 가르칠 내용과 방법, 그리고 교회 성장의 제정 및 그 실행문제가 결정되었다.
가르치는 내용은 의인, 신앙, 성화였고 가르치는 방법은 부르고, 순종케하고, 예수님께 바치고 신앙을 북돋아 주는 일이었고, 교회성장의 제정및 실행의 문제에서 존 웨슬리는 신도회를 재정리하여 신앙의 단계별로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즉 The Unitied Societies, The Bands, The Selected Societies The Penitents이었다. 이들 그룹은 각기 특별 준칙이 제정되어 운영되었다.
이 연회에서 결정된 또 하나의 규정은 평신도 설교자의 임무였다. 이들의 임무는 목사의 유고시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을 다스려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었다.
평신도 전도자
존 웨슬리는 중생의 체험을 한 뒤, 교권과 교회의 의식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영국교회의 고교회주의(高敎會主義)를 반대하였는데, 그는 평신도 전도자를 선발하여 설교와 신자의 방문에 전무케 하였는데, 이 사실로 보아 그는 의식주의 교회관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볼 수 있다. 교권과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웨슬리가 평신도에게 설교할 권한을 주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신도를 웨슬리가 설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의 교회관에서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영국교회의 교권제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웨슬리는 사도직의 전승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교회제도는 교회의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제도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교회제도의 목적은 인간들의 영혼을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 인도하여 그들을 세우고자 함이며, 제도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은 그의 전도활동 전반에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평신도 전도자라는 제도도 그의 교회관에서 연유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단체를 운용해야만 전도활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거 생각한 웨슬리는 그 조직자의 책임자를 목사가 아닌 평신도에게 맡겼다. 이 책임자들에게는 정기적인 순회교육을 통하여 책임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들은 자기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 무보수(無報酬)로 일하였다. 평신도 전도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1747년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그 자격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그 사람이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며,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언행이 거룩한지 살필 것
● 그들이 그 사업을 감당할 재능과 은혜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도리를 판단할 만한 분별력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에 대하여 정당한 관념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의 구별이 있어서 자기의 의사를 사리에 맞고 유창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
● 그들의 과거의 사역의 업적을 살필 것 등이었다.
평신도 전도자들은 비상한 극기와 금욕적 생활을 하였으며, 전도자의 규칙에 보면 초기에는 신도들로부터 금품을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들의 일용품은 대개 신도회로부터 받았으며, 금전은 여비 정도를 받았는데, 그것은 항상 넉넉치 못해 먼거리도 보통 걸어서 다녔다. 이와 같이 평신도 전도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의 결과, 런던에서는 2,000여명의 신도들이 모였고, 속회 제도는 원만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평신도 전도자의 사용은 목회자 혼자 10인분의 일을 할 것이 아니라, 10인의 평신도와 함께 공동사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목회자 혼자 일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교회성장학의 주장을 이미 18세기의 웨슬리가 이미 실천했었다는 사실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