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공사, "문재인이 얘기하는 연방제 통일은 북한이 주장하는 기만술"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기만술… 북한 주민도 안 믿는다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들 - ‘김현희 가짜설’을 반박하는 결정적 증언
“김현희 체류했던 오스트리아 정부 KAL 858기 폭파 사건 직후 북한 당국에 공식 항의”
⊙ 오스트리아를 간첩 훈련 기지로 삼지 마라 항의, 김현희 관련 자료 인터폴에 다 있다
⊙ 김정철 마약 사건으로 런던에서 체포된 일 없다
⊙ 김정남 런던 체류설 사실 아냐. 런던에 왔다면 공관에 연락 왔을 것
⊙ 황장엽과 망명 시기·상황 비슷하지만 구애받지 않고 통일운동 할 것
⊙ 북한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당선 소식을 한동안 주민들에게 알리지 못했던 이유
⊙ 북한도 처음에는 신은미씨를 믿지 않았다
⊙ 북한, 천안함 격침 이후 “해군도 붙어 볼 만하다”는 자신감 가져
⊙ 스웨덴·덴마크·영국 등 북유럽보다 보건의료 시스템이 잘 돼 있는 데 놀랐다
⊙ 현영철뿐만 아니라 리영호도 도청에 걸려 처형
⊙ 6·15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은 승리한 분위기였다
⊙ 남조선 해방 전략은 핵무기·대량살상 무기 개발 후 남한 전체를 없애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으로 외교 등에 있어서 압박 상당히 받아
⊙ 친북 교포들 포섭할 필요 없었다. 자발적으로 찾아오니까
⊙ 북한 핵개발에 대북포용정책 도움 돼… 개성공단, 금강산 돈 어디 갔겠나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가족과 함께 지난해 7월 말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귀순 후 관계 당국의 조사와 남한 생활 적응을 위해 5개월여의 시간을 보낸 그는 최근 활발하게 공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신문, 방송 등 언론 인터뷰가 그 첫 번째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이다.
수많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자신이 남한으로 귀순한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북한 사회의 문제점 등을 털어놓았다. 아마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같은 말은 수십 차례는 반복했을 것이고 국민들도 이제는 태 전 공사의 입을 통해서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는 생각일 것이다.
《월간조선》이 이런 상황에서도 태 전 공사를 인터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다른 매체에서 묻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태영호 전 공사에 대한 언론 인터뷰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월간조선》이 묻고 싶었고 국민들이 정말 궁금해할 이야기들을 물었다.
― 혹시 한국으로 오시기 전에 《월간조선》에 대해 들어봤습니까.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는데 《월간조선》은 한국에 와서 알게 됐습니다.”
― ‘탈북자’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고 사용한 곳이 《월간조선》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탈북이라는 표현이 어디서 나왔는가 궁금했는데 《월간조선》이 만든 말이군요.”
― 62년생이죠.
“네. 범띠.”
― 북한에서도 띠를 사용합니까.
“네, 써요. 부모님들이 가르쳐주죠. 여기로 치면 소개팅할 때 띠를 보거든요. 어느 띠와 어느 띠가 맞느냐 같은 것을 보죠. 그거 안 맞는다고 배우자 선정할 때 갈라서기도 합니다.”
태영호 공사에 따르면 1987년 11월 오스트리아 정부는 북한 외무성에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자국을 경유한 데 대해 항의하며 “오스트리아를 북한 간첩 양성 기지로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 KAL 858기 폭파 사건의 김현희씨도 62년생인데 한국에 와서 만나봤습니까.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 남한에서는 김현희씨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들어봤습니까.
“김현희가 가짜라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김현희하고는 학교 동문이거든요. 제가 평양외국어학원을 나왔고 김현희는 평양외국어대학을 나왔죠. 외국어대학 밑에 평양외국어학원이라는 중등학교가 있어요. 외국어대학 학장과 외국어학원 원장을 같은 사람이 해요. 같은 학교 동문이라고 할 수 있죠.”
― 나이도 같은데 학교 다닐 때 혹시 평양에서 김현희씨를 보지 못했나요.
“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김현희는 북한에서 대남 공작대로 갔거든요. 그 이후에 KAL기 사건이 났고 김현희의 부모나 가족들은 다 사라졌죠.”
― 혹시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까.
“못 들어봤어요.”
― 그럼 김현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KAL 858기 폭파 사건 후에 알게 됐군요
“그렇죠. 제가 그 사건 당시 외무성 유럽국에 있었거든요. 김현희가 KAL기 폭파하기 전에 유럽을 거쳐서 갔는데 그때 오스트리아를 경유했죠. 그때 오스트리아 정부 당국이 김현희가 언제 오스트리아에 들어왔다가 언제 어떻게 해서 나갔다는 구체적인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가지고 북한에 공식 항의했습니다.”
― 어떤 항의였습니까.
“‘왜 오스트리아를 북한 간첩 양성(養成)기지로 이용하느냐,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때는 외교적인 조치를 가하겠다’고 오스트리아 당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에 항의했죠. 물론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 김현희씨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태 공사의 증언이 아픈 증언이네요.
“김현희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거는 인터폴에 그 자료가 다 있습니다. 인터폴에서 KAL기 사건 있은 다음에 자료를 조사해가지고, 김현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 나라들에서는 공식적으로 북한에다 항의하고 물밑에서는 상당한 그 외교적인 분쟁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럽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알죠.”
― 김현희씨의 아버지 김원석씨도 외교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분은 외무성 소속은 아니었어요. 북한 대사관에는 외무성 소속 직원뿐만 아니라 그때로 말하면 무역성, 대외경제성 소속 사람들도 나와 있거든요. 그분은 외무성은 아니고 대외경제성, 즉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소속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어요. 무역성하고 기구가 다 통폐합됐죠.”
― 김현희씨 아버지를 만날 일은 없었죠?
“만날 일은 없었고 당시 외교가에 딸이 KAL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가족은 다 수용소로 갔다는 이야기가 돌았죠.”
한국의 복지 선진국을 앞서는 의료 시스템에 놀랐다
김정은이 핵폭발 장치로 추정되는 구형 물체 앞에서 얘기하고 있다. 태영호 공사는 “핵개발 이후 북한은 대남 전략을 ‘남조선 해방’에서 ‘초토화’로 바꿨다”고 증언했다.
― 그동안 인터뷰하면서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것은 없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가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현재 MBC에서 나오는 드라마 〈불어라 미풍아〉 이야기를 했죠. 제가 그때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 이야기를 다룬 〈불어라 미풍아〉 같은 드라마가 북한에서 상당히 인기 있다’고 말했는데 일부 언론에서는 ‘〈불어라 미풍아〉가 지금 북한에서 인기 있다’고 보도를 했더군요. 저는 그런 콘텐츠가 북한에서 매우 인기 있다고 한 건데 말이죠.”
― 햇볕정책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가 됐던데요.
“그것도 제 말을 자르고 보도했더군요. 제가 ‘햇볕정책이 북한에서 북한 사람들의 남한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낮추는 데 일정한 역할과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성공단을 다시 재개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일부 언론은 그 뒤에 개성공단 이야기는 빼고 앞의 말만 강조한 것이죠. 햇볕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고 말이죠. 사실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출근은 합니까.
“제가 필요할 때마다 나갑니다.”
― 언론 인터뷰에서 ‘생각하던 한국과 겪는 한국이 다르다’고 했는데 어떻게 다릅니까.
“상당히 많은 부분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릅니다. 북한 외교관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한국 사회가 대단히 민주화돼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막상 생활상 측면에서 부딪혀보니까 첫째, 한국의 보건 시스템이 아주 잘 돼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영국 등 말하자면 복지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모델이라는 나라들에서 살았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그 나라들보다 상당히 보건 시스템이 잘 돼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 살 때는 병원에 가서 예약하고 치료받자면 3개월에서 6개월 걸리는데 여기서는 병원에 가면 즉시 그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들이 처리해 주더군요. 북한하고는 아예 비교할 바가 못 되고요.”
― 긍정적인 측면에서 다르다고 했던 것이군요. 다른 사례는 없습니까.
“서비스 문화입니다. 예를 들면 짜장면을 주문하면 금방 오고 다 먹은 후에 그릇을 내다 놓으면 즉시 가져가는 게 놀라웠습니다. 이런 서비스는 제가 보기에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톱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부 구조가 잘 돼 있어요.”
― 하부 구조요?
“도로, 철도 등 사회간접시설이 너무 잘 돼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이 발전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됐어요. 도로 시스템은 정말 부러웠습니다. 북한은 도로가 너무 열악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 때 함경북도 명천에서 자랐는데 거기에 지금 친척들이 많습니다. 명천에 가려고 하면 한국에서라면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북한에서는 이틀이 걸려요. SUV 승용차로요. 명천에 있는 칠보산을 가려면 평양에서 아침에 떠나서 가면 밤에 함흥까지 가요. 함흥에서 하룻저녁 자고 그 다음날에서야 도착하게 되는 거죠. 한국은 반나절 생활권이라는데 북한은 24시간 생활권도 꿈도 못 꿔요.”
― 통일이 되면 북한에 건설할 일이 엄청나겠군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건설업체, 제조업체, 중공업이 상당히 침체 상태더군요.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는데 4차 산업혁명으로 한국이 빨리 도약하는 건 좋은데 그렇게 되면 건설업과 제조업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수만 명이 다 실업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 생각에 경제적으로 보면 한국에 일정한 과도기가 필요한데 이 과도기를 남북통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지역에는 엄청난 건설과 제조업 수요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통일은 이렇게 한국이 4차 산업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이라는 말을 영국에 있을 때 들어봤습니까.
“영국에서는 듣지 못하고 여기에 와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통일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사람이 통일 문제를 대할 때 득실 관계 측면에서 보더군요. 저는 득실 관계를 논의하기에 앞서서 나라를 통일하지 않으면 한국 국민들의 생존이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국방부가 백서를 발표했는데 북한이 플루토늄 생산을 재개했다고 하고 핵무기도 10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위협 공갈한다면 1~2개면 충분하죠. 그러나 이 방대한 양의 핵물질과 핵무기를 북한이 가지고 있다는 자체는 남한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입니다. 북한의 대남 전략은 60, 70, 80년대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당시 대남 전략은 남조선 해방 전략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이 먼저 타격하고 밀고 내려가 이렇게 해서 해방한다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남조선 해방이라는 말 안 씁니다.”
― 뭐라고 합니까.
“불바다. 최근에 김정은도 말했죠. 남조선을 쓸어버리겠다고요. ‘해방’이라는 말에서 ‘쓸어버린다’로 바뀐 것은 남조선 전체를 핵무기로 아예 없애버린다는 얘깁니다. 남한 자체가 이제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맞춰서 군사 전략도 수정했어요. 핵무기와 대량살상 무기 중시 전략입니다. 지난 시기 북한이 해방 전략이었을 때는 탱크, 장갑차 등을 생산하기 위해 강철을 많이 생산했어요. 그러나 전쟁 전략이 핵탄, 생화학 무기 이런 걸 사용해 다 죽여버린다는 개념으로 달라졌어요. 북한의 이런 군사 전략 변화를 알고 진짜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통일의 득실 관계를 따질 게 아니라 통일을 통한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핵 참화를 머리에 이고 살면서 국민들이 지난 수십 년간 이룩한 경제 발전 등 모든 걸 보호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외교관의 탈출은 어렵지 않다
북한 인민무력부 부장 현영철(좌)과 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우)는 사석에서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다가 도청에 걸려 처형됐다고 한다.
― 영국 런던 탈출 당시 감시원들은 어떻게 따돌렸습니까.
“영국은 공관이 작아서 감시요원들이 없어요.”
― 자유로웠네요.
“상당히 자유로웠죠. 결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본인이 결심만 하면 탈북하기 쉽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북한 외교관들에게 말했거든요. ‘탈북 면허증이 쥐어져 있을 때 결심하고 한국에 오라’고요. 본인이 결심만 하면 상대적으로 굉장히 쉽습니다.”
― 북한에서 가장 자유로운 직업은 외교관이네요.
“북한에서는 외교관이 그야말로 특권을 누립니다. 북한 체제에서 외화로 월급을 받는 직종은 외교관뿐이거든요.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가족들을 데리고 외국에서 사는 것도 그렇고요.”
― 외교부부장 박명국이 호주대사관 공사로 있을 때 딸 박은별이 학비 지원이 안 돼서 21세인데도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하던데요.
“북한은 외교관에게 학비나 의료비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를 무료로 다닐 수 있는 나라가 많아서 북한 외교관들은 자식들 나이를 낮춰서 학교에 보내 영어 공부를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 왜 탈북을 결심했습니까.
“애들이 북한 사회가 어떻다는 걸 다 아니까 자기 미래를 걱정했어요. 북한에 돌아가면 자기 꿈을 접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요. 부모로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노예의 삶을 자식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내가 끊어줘야 후손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유럽이나 미국을 선택하지 않고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오로지 통일에 기여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까.
“네. 일부 지난 시기에 탈북한 선배들 중에 미국에 간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탈북하는 이상 제가 앞으로 통일을 위해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곳이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북한 실상에 대해 미국에 가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 기자간담회에서 “북한 고위직에 대한 도청이 일상화됐다”며 “작년 5월 총살당한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은 집에서 잘못 말한 얘기가 도청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태 공사가 아는 내용을 인민무력부장인 현영철이 몰랐을까요.
“제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얘기는 현영철이가 ‘집에서 도청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는 이렇게 고위층까지도 다 집단생활을 시키고 집에다 다 도청기를 설치해 일거일동을 감시한다는 얘기였어요. 이 감시 과정에서 현영철도 걸린 거라고 했죠. 딱 ‘집이다’라고 한 게 아닌데 장소가 집인지 다른 장소인지는 모르죠.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도 도청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 외화벌이에 직접 나서기도 했습니까.
“외교관들 중에서 외무성 일꾼들한테는 외화벌이 과제를 주지 않습니다.”
― 외교관들한테 군사기밀 수집도 시킨다면서요.
“기밀 수집을 시킵니다. 한국 언론들이 제가 핵잠수함 관련 자료를 수집하지 못해 처벌이 두려워서 탈북했다고 하는데 그건 맞지 않는 이야기예요. 설사 군사기밀 수집을 집행하지 못했다고 해서 처벌하지는 않아요. 본인이 재량껏 하는 거죠.”
황장엽과 나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진보 정권’을 자처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10년 동안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태 공사는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소신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 한국에 온 시기가 공교롭게도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올 때의 상황과 비슷하게 정권교체기입니다. 황 선생은 보수 정권인 김영삼 정부 시절에 귀순했습니다만 이어 등장한 김대중·노무현(金大中·盧武鉉) 정부 10년 동안 통일을 위한 북한 민주화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마음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혹시 정권의 성격이 바뀌면 귀순할 때 품고 온 북한 인권과 남북통일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요.
“저에 관한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그런 염려를 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태 공사가 한국의 정치 상황을 잘 모르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활동하는데 좀 주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러다가 금방 정권이 교체돼서 진보 세력한테 정권이 넘어가면 황장엽 선생처럼 엄청난 정치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섣불리 이렇게 언론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견해를 밝히지 말고 좀 자제하고 대통령 선거까지 지켜보고 그다음에 하라’ 하는 충고들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보수가 집권을 하든, 진보가 집권을 하든 통일은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북한 주민들을 노예 체제에서 해방시키는 시간을 화급하게 다투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건 민족적인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한국 국내의 정치적 변화에는 구애받지 않고 제가 가지고 있는 소신 그대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 남한 내의 대북(對北) 전문가들은 많이 만나봤습니까.
“대북 전문가들과 대북 정책에 대해 논쟁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한국 국민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똑바로 알리고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주는 활동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 북한 전문가들도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요 며칠 전에도 대북 문제를 놓고 전문가들과 간담회 형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분들은 북한에 대해 ‘공산 체제’ 또는 ‘공산 사회’라는 용어를 쓰더군요. 북한은 공산 사회가 아니고 노예 사회예요. 북한을 자꾸 공산 체제라는 표현을 써서 북한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접근법이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갈라질 수밖에 없어요. 공산주의 이론에 세습이라는 건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 자체는 세습을 반대합니다. 세습은 결국은 봉건시대에서 내려오는 이론인데 북한은 공산주의의 외피를 쓰고 세습 정권을 유지하는 노예 사회와 같은 나라가 됐거든요.”
― 북한을 노예 사회라고 부르는 근거는 뭡니까.
“노예라는 것은 3가지 개념을 가집니다. 첫째,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둘째, 표현의 자유가 없습니다. 셋째, 이동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의 외피를 쓰고 생산수단을 다 몰수해서 국가 권력에 집중시켰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 생산수단이 국가나 사회의 소유가 아니라 김씨 가문에 소속돼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표현과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공산’이란 표현을 자꾸 쓰면 접근법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김정은, ‘미친놈’ 아니다… 안하무인 행동은 계산된 우상화 작업”
김정은이 2015년 2월 5일 평양화장품 공장을 시찰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회의, 현지 지도 등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김정은의 안하무인격 행동은 계산된 우상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 김정은 체제를 옹호할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북한 외교관들의 제일 사명은 김정은 체제를 옹호하는 겁니다. 김정은 체제는 유럽 좌익들, 공산당 계열에서조차 비난받습니다. 외부 세계에선 김정은을 바로 보지 않거든요. 현지 지도를 하면서 지하철이나 병원에서 담배를 피우는데요, 북한 사람들도 ‘야, 저건 지나치지 않으냐?’고 생각해요. ‘하늘의 태양’이라는 김일성도 그러진 않았는데, 김정은이 ‘미친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데는 다 목적이 있어요. 젊어서 지도자가 됐고, 단기간에 후계자로 임명됐기 때문에 항상 주변 간부들이 자기를 낮춰 보지 않겠느냐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 ‘나는 너희 위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다 할 수 있다’라는 걸 확고하게 보여주려는 거예요.”
―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고요.
“눈길만 마주쳐도 죽이고, 담배도 아무 데서나 피우고.”
― 또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북한은 수령을 신으로 만드는 체제예요. 우상화 작업 집단에서 담배 피우고, 간부들이 무릎 꿇는 사진을 왜 보내겠느냐? 그런 방향으로 정책이 섰기 때문입니다.”
―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이 통과된 후 북한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기 어려웠나요.
“어려웠습니다. 인권 문제 때문에 상당히 위축되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 결의안이 나오고 나서 전 세계적으로 북한 인권 실상을 폭로하는 청문회를 많이 했습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예요. 의회 보고서나 기사를 접한 영국인들은 북한 인권 실상을 폭로하면 처음에는 믿지 않아요. ‘저거 누구 돈 받고 저러는 거 아냐?’고 하는데, 계속 이야기가 나오면 ‘정말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느냐?’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관심을 갖죠. 점점 북한이 궁지에 몰리고 있습니다.”
― 인권 문제를 제기한 게 효과가 크군요.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면 북한도 달라질 겁니다.”
― 계속 ‘북한 인권 실태’를 알려야겠네요.
“탈북민이 3만명이 넘거든요. 3만명이 한목소리로 인권 실상을 폭로하는 증언자로 나선다면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로 넘기는 건 일도 아니에요.”
“김여정은 ‘관심병 환자’… 역할 제한적”
― 김정남이 현재 영국에 있습니까.
“영국에 왔다면 공관이 모를 리 없죠. 사전에 안전 점검도 하고. 예를 들면 한국에서 김정남에게 접근하지 않나 감시하는데, 김정남이 영국에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 김정남 아들 김한솔은요.
“김한솔은 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 김여정의 역할이 제한적일 것이라고요.
“개인 판단인데요. 김여정이 주로 행사를 관할하거든요. 중앙당 부부장 직책을 가진 사람이 김정은 옆에서 그렇게 하는 건 시스템상 맞지 않거든요. 김정은 옆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싶어 그러는 것 아니냐…. 김여정이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 관심병 환자네요.
“북한에선 경박하다고 하거든요.”
태영호 공사는 “김여정이 김정은 곁에 자주 나타나는 건 ‘관심병’ 때문이며, 항간에 도는 ‘김여정 정신 이상설’은 근거가 없다” 말했다.
― 김여정 정신이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옆에서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걸 보면 정상입니다.”
― 김정은이 김여정에게만 자상한 이유는 뭣 때문일까요.
“동생이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하겠죠.”
― 미국 정보기관은 2년 전에 김정은의 정신·신체 건강을 봤을 때 3년 안에 죽는다고 했는데요. 김정은 건강 문제가 심각한가요.
“그거에 대해선 아는 바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의료진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건강관리를 하니까 쉽게 가진 않을 겁니다.”
― 김일성, 김정일도 급사했지 않습니까.
“김정은은 아직 어리니까 살날이 많이 남았을 것 같고…. 걸어가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잖아요? 김정은이 현지 지도하는 동영상 보세요. 간부들이 따라가질 못해요.”
“김여정 권력 승계 가능성 없어… 북한은 ‘김정은’으로 끝난다”
태영호(우) 공사는 2015년 5월 영국 런던을 방문한 김정은의 동복형 김정철(좌)을 수행했다.
― 김일성이 쓰러졌을 당시 김정일이 의도적으로 의료진 투입을 막아서 죽게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 같습니다.”
―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실권을 줬는데 경제가 망가졌다는 걸 알고 김정일 힘을 빼려고 하다가 죽어서 그런 추측이 나왔는데요.
“김일성은 그전에도 경제 부문 사람들을 모아놓고 얘기할 때 북한 경제에 대해 비관적인 얘기를 계속했어요. 아침 식사 시간에 김일성이 보고 문건들을 보면서 ‘배급을 못 준다는 게 무슨 소리냐?’며 아침밥도 안 먹고 자리를 뜨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간부들한테 ‘수령님께서 배급이 제대로 안 간다고 고심하는데, 생산 좀 열심히 해라’ 이렇게 교양했거든요.”
― 김여정이 김정은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북한은 김정은에서 끝납니다.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올라갔을 때 북한 엘리트들의 기대감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올라갔으니까 우리도 잘살지 않겠느냐 했는데, 겪어보니 세습 통치의 허구성을 다 알게 됐어요. 민심은 정말 중요합니다. 민심이 진심으로 지도자를 따르느냐, 공포 통치에 눌려서 가느냐는 차이가 큽니다. 예측하긴 어렵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김정은 체제는 훨씬 빨리 무너질 겁니다.”
― 김평일을 만나본 적 있습니까.
“여러 번 만났습니다.”
― 권력 핵심부로 진입하려는 노력은 안 합니까.
“노력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죠. 엄격하게 관리·통제하기 때문에 체코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있습니다.”
― 김정철이 2015년 5월 런던에 갔을 때 첼시 하버 호텔에서 마약을 하다 걸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은 법치국가입니다. 공항에서 매우 엄격하게 마약을 단속합니다. 마약 하는 사람들이 지폐를 말아서 마약을 흡입하니까 영국엔 마약 묻은 지폐가 많습니다. 돈을 주고받고 하면 지갑에 그런 돈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공항에 가면 딱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마약중독자이기 때문에 냄새가 나느냐 검사를 하는데, 김정철이 자기 마약을 가지고 영국에…. 그건….”
― 영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해준 얘기거든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영국 당국이 김정철이란 걸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어요?”
“영국 주재 당시 한국 교민들과 교류… 포섭 시도는 안 해”
― 해외 생활을 하면서 친북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봤습니까.
“친북이라고 하긴 어렵고 동포들을 돕기 위해 북한에 자주 들어가는 분들은 많습니다.”
― 그 사람들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한 겁니까.
“네. 우리가 북한 장애인을 위해 학교를 세우려고 한다는 식으로 많이들 제의하고, 실제로 북한에서 대부분 실현됐습니다.”
― 교포들이요?
“해외교포들이죠.”
― 그들을 포섭하려고 했습니까.
“제가 포섭한다고요? 그런 사람들은 포섭할 필요가 없죠. 제 발로 자주 가는 사람들이니까.”
― 남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나요.
“영국 국적을 가진 한국 교민들은 자주 만났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집에도 서로 놀러 가고 그랬습니다.”
― 임무 때문에 그런 겁니까.
“북한에 밀가루도 보내고, 도와준다니까.”
― 유럽에 있을 때 송두율이란 이름을 들어봤습니까.
“못 들어봤어요. 그분이 혹시 북한을 왕래한다는 사람인가요? 독일에 있는….”
― 네, 국가정보원 수사 결과에 따르면 송두율은 북한 노동당 권력 서열 23위 김철수라고 하는데요.
“송두율이란 이름은 들어봤지만, 만난 일은 없습니다.”
― 이름만…?
“네, 북한 신문에 많이 나왔거든요.”
―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윤이상, 이응노 얘기는요.
“그것도 북한 신문에 나온 것만 봤습니다.”
― 독일 유학 중 일가족이 북한에 갔다가 혼자 탈출한 오길남씨는 아시나요.
"구체적인 사항은 모릅니다.”
“개성공단·금강산에서 나온 돈 핵개발에 썼다”
— 이른바 ‘햇볕정책’을 평가한다면요.
“당시엔 북한 사회에 남한의 발전상을 알리고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서 적대감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느냐? 앞으로 남한 정부는 대북 강경 기조를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교류·협력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원칙 있는 교류·협력을 해야 합니다.”
— 대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건가요.
“남한의 대북 정책이 북한 내부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실례를 들겠습니다. 서울대와 어린이어깨동무란 비정부 단체가 2008년 평양의학대학 앞에 소아 병동(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을 하나 지었어요. 북한은 소문이 날까 봐 단속했는데, 이게 소아 병동이니까 파급 효과가 엄청 커요.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부모가 오지, 할아버지·할머니가 오지…. 평양시 주변의 간부 손자들, 부잣집 손자들이 먼저 입원하기 시작했는데 병원에 놀이장, 도서실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 놀랐어요. 북한엔 그런 개념이 없거든요. ‘아동병원을 한국에서 해줬는데 주민들 평가가 좋다’는 보고가 김정은에게 올라갔어요.”
— 김정은 기분이 안 좋았겠네요.
“김정은이가 화나지 않겠어요? 그것도 비정부 단체가 한 건데, 그런 여론이 돈다? 눌러야 한다. 그래서 김정은이가 2014년에 아동병원을 평양 문수거리에 크게 짓고, 외국에서 장비들을 갖고 왔어요. 한국이 그런 일을 해주지 않았다면, 김정은이 병원을 지었겠어요? 개성공단 문제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제일 열악한 게 병원입니다. 개성공단도 매달 1000만 달러씩 현금으로 주지 말고, 우리가 병원을 하나씩 지어주겠다 하여 관철했다면 북한의 도 인민병원은 다 한국에서 건설한 병원과 설비가 들어갔을 거예요. 이게 결국 남한의 발전상을 알리고, 남북의 동질성을 찾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 개성공단을 다시 열어야 한다는 겁니까.
“북한에 뭘 주려고 하면 국제공동체 규정과 원칙을 지키면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 금강산 관광도 재개해야 합니까.
“남한 국민들이 북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대신 그 대가는 김정은 주머니가 아닌 병원이나 고속도로처럼 진짜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 김정은이 그런 조건으로 할까요.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현금 대신 도로를 건설해 주겠다고 주장해 봤느냐? 이제부터라도 올바로 가야 합니다.”
― 소위 대북포용 정책이 북한 핵개발에 도움이 됐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개성공단, 금강산에서 나온 돈이 어디 갔겠습니까.”
― 북한 주민들은 ‘포용 정책’이란 말을 모르겠죠?
“무슨 뜻인지 가늠하지 못하죠.”
“종북 세력, 탈북자 3만명 얘기 듣고 북한 실상 제대로 알아야”
북한 당국은 처음엔 재미교포 신은미를 믿지 않고 그 활동을 감시했지만, 국내에서 ‘종북 인사’로 몰린 후부터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 신은미를 압니까.
“들어봤어요. 신은미씨가 한국에서 공격받았거든요. 북한 내부에선 신은미씨가 처음 북한에 왔을 때 색안경을 끼고 그 활동을 감시했어요. 북한 실상을 알리는 게 홍보 효과가 좋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는데, 한국 보수층이 (신은미를) 공격하니까 ‘야, 이거 정말 우리한테 좋은 거 아니냐?’ 생각을 바꿨어요.”
― 신은미를 공격한 게 실수였네요?
“실수라고 할 수는 없고, 신은미씨의 활동으로 이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예상하진 못했죠.”
― 남남갈등을 일으키고?
“남한은 민주화된 사회라고 하지만, 신은미를 탄압하는 걸 봐라. 민주화된 사회가 아니다. 파쇼 정권이다 라고 홍보하는 데 써먹었죠.”
― 종북 세력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유민주 체제 안에서는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든 그건 자유입니다만,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3만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북한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듣고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으면 합니다.”
― 황장엽은 남한 각계각층에 고정간첩이 굉장히 많다고 했는데요.
“지난 시기 북한이 간첩을 많이 남파한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이 지금도 북한을 지지하겠나? 북한 주민들도 그 체제에 등을 돌렸는데, 하물며 남한의 압축 성장과 민주화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간첩 활동을 하겠나 싶어요.”
― 여전히 종북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종북 세력이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진 잘 모릅니다. 민주 사회이기 때문에 견해 차이는 자유롭게 발표하고. 유럽엔 공산주의가 승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요. 공산당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 천안함 관련 음모론이 여전한데요.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천안함을 우리가 격침했다고 얘기하진 않는데, ‘한국과 붙으면 공군은 안 된다, 해군도 안 된다, 육군은 붙어봐야 안다’고 했는데, 천안함 이후에는 해군도 자신 있다는 말이 돌아요.”
― 북한 무력 도발 시 확전이 우려돼 대응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한국은 ‘예측 가능한 나라’가 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미국, 중국, 일본이 불안해하는 겁니다.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행동 준칙이 다 있어요. 이스라엘 보십시오. 매우 작은 나라지만, 자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황이 조성되면 어디든 가서 까버리거든요. 한국도 천안함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무조건 그만한 피해를 되돌려준다는 걸 북한이 알게 해야 돼요. 그걸 똑바로 안 하기 때문에 지뢰 사건도 나고 그랬잖아요.”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기만술… 북한 주민도 안 믿는다”
―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북한 지도층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즉각 발표하지 않았거든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북한 주민들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북한에선 김대중 하면 남한 독재 정권의 피해자예요. 김대중씨에 대한 영화도 많아요. 일본에 갔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서 한국에 오는 거, 신민당 시절에 탄압받는 거, 중앙정보부에 가서 매 맞는 거, 이런 영화가 많아요. 그래서 북한에선 김대중을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되니까 어떡하겠어요? 북한은 ‘지금까지 북한이 벌여온 민족자주통일 노선이 정당하다는 걸 알고 남한 주민들이 김대중을 뽑았다’고 정리했습니다.”
― 북한에서 김대중 외에 남한 인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일이 있습니까.
“김대중, 최덕신(전 외무부장관, 1986년 월북), 최홍희(전 국제태권도연맹 총재, 1980년대부터 친북 활동). 이런 사람들 영화는 다부작으로 나왔어요.”
― 북한 당국이 김대중 당선 사실을 알리는 데 몇 달 정도 걸렸습니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이런 식으로 남한의 달라진 정치 상황을 알리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어요.”
― 노무현 당선 때는요.
“김대중・김정일이 6·15시대를 열었거든요. 북한 당국은 ‘6·15시대를 끊기 위해 보수 세력이 총결집해서 달려들었지만, 또 진보 세력이 재집권했다. 이것은 6·15 정신이 정당하다는 걸 한국 국민이 인정한 결과다’라고 했죠.”
― ‘6·15선언’ 때 북한 내부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북한은 승리를 경축하는…. 김대중은 북한 주민들에게 독재 정권에 항거한 아이콘이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평양을 먼저 찾아왔거든요. 북한에선 당연히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주민교양을 숱하게 했어요.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발표했을 때 ‘이건 북한을 녹이려는 전략이다’라고 규정했거든요. 햇볕정책에 대한 판단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어요. 이걸 우리가 잘못 이용하다가는 붕괴될 수 있다, 북한 말로는 모기장을 친다고 해요. 모기장을 치면서 챙길 건 챙기고 이렇게 하자고 생각했죠.”
― 김대중·김정일의 소위 6·15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진의는 뭡니까.
“그건 기만입니다.”
― 기만이요?
“연방제 통일이라고 하는데, 그건 남한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술입니다. 통일을 한번에 할 수 없으니 단계적으로 가자. 통일 정부를 만들어서 외교, 안보를 관할하게 하고, 남과 북 사이에 차이점이 없어지면 통일로 간다? 이건 완전히 기만입니다. 북한 사람치고 그걸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실현 불가능합니다.”
“북한 붕괴시키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아야”
태영호 공사는 북한을 ‘노예 사회’로 규정하고, “자식들에게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귀순했다”고 밝혔다.
― 한미동맹과 조중동맹 중 어느 쪽이 견고합니까.
“같아요.”
― 중·북 관계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습니까.
“한국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북한이 핵을 쥐면 중국에도 쏠 수 있다는 걸 알려야 합니다. 중국이 동북3성 개발 문제를 고민하거든요. 동북 3성 개발에 한반도 통일이 도움된다는 걸 납득시키고,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가 통일되면 미군은 한반도에서 나간다는 거래를 해야 돼요.”
― 우리의 핵무장이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입니까.
“핵무장은 전 세계 핵 질서를 뒤흔드는 큰 문제거든요. 한미동맹도 흔들릴 수 있어요. 실제 핵무장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핵무장 선언’ 카드는 써야 합니다. 미국과 사전 협의하고, 중국에는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핵무장 선언’ 카드를 활용해야죠.”
― 북한 붕괴를 촉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이 쓸 수 있는 수단은 많은데, 정부가 지금 쓰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 많다고요?
“북한 사람들은 돈밖에 모릅니다. 군대도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어요. 북한 주민들이 봉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 엘리트나 젊은이들은 미래를 그리지 못해요. 그들이 지금껏 본 것은 소련과 중국 같은 독재 체제예요. 삼권 분립,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북한은 이조 봉건 사회, 일본 통치, 공산 독재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이걸 한국이 심어야 합니다.”
― 지금껏 삐라도 뿌리고, 각종 콘텐츠를 담은 USB나 DVD를 보냈는데도 봉기하지 않는데요.
“북한 주민들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한국이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건 잘 알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투쟁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민중봉기를 일으키려면 정부가 주도해서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북한에 유입시켜야 합니다.”
― “장마당을 폐쇄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거기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을까요.
“북한의 장마당이 한국 물건과 돈에 의해서 가동되게 만들어야 해요. 그렇게 할 수단도 있어요. 드론도 있고. 정부가 개입해서 이를 주도해야만 우리가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습니다.”
― ‘민중봉기’를 얘기하면 ‘북한을 무너뜨리려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라고 얘기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국민을 핵 참화에서 구하고, 북한을 무너뜨리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북한이 쏜 핵폭탄이 서울에 떨어져 수백만 명이 죽는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겁니까.”
― 일각에선 태 공사가 핵공포를 조장한다고 하겠네요.
“사실을 얘기해서 국민들이 정말 위험성을 깨닫고 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임진왜란 때 보세요. 일본은 치려고 다 준비를 했는데 조정에선 일본이 오느니, 안 오느니 하고. 6·25 동란 때 북한군은 탱크 배치를 끝내고 당장 치러 가는데, 서울 장안에서는 국군이 북한을 치면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하다가 얻어맞았거든요.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국민에게 북한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신중히 들어보고, 한국 정부와 국민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