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신앙을 내려놓지 않으면 교만으로 망합니다.
믿음은 내가 육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인정받는 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조건은
성령으로 회개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도 글을 쓰면서
혹여나 내 지식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보이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닌가 늘 고민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쓰는 것이지만
그 영감 속에 내 지식과 의를 포함시키지 않았나 걱정합니다.
그래서 글을 썼다가 내 의와 생각이 섞였다고 판단되면
썼던 글을 지우고 올리지 않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기독인들은 신앙 글을 참 많이 접합니다.
신앙 글을 읽으면서 조심할 게 있습니다.
혹여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배우고 습득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잣대 삼아 평가하며 읽지 마십시오.
글을 읽는 기준이 내가 아는 지식이 되면
은혜란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의 푯대로 이해하다 보면
신앙 글을 읽을 때 영의 양식을 흡수하려는 것보다
내가 아는 지식과 뭐가 다른가를 확인하려 들고
심령상태가 가뭄에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메마른 상태가 되듯
무엇이 잘못되었나 지적하고픈 교만한 마음만 올라옵니다.
제가 한때 그랬습니다.
도통 은혜가 안 되고
내가 글을 읽고있는 이유가 뭔지 회의마저 들었습니다.
은혜는 둘째치고 오히려 교만한 마음만 출렁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건 이런 것이지 왜 그런 거야?
이게 말이 되나?
이건 이렇게 표현해야지 저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
속으로는 글쓴이를 하수로 보고 비웃습니다.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것도 글이라고 썼나..
저번에는 이렇게 써서 내가 지적해 줬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썼나 확인해 봐야지...
글 전체의 흐름은 안 보고 말꼬리만 붙잡고 공격합니다.
신앙 글을 읽어도 뭐 가르치고 지적할 거 없나만 생각하고
그런 사냥감이 될 글만 찾아다닙니다.
상대 글을 동의해도 그냥 지나가면 지나갔지
결코 아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방 논쟁으로 번집니다.
아니 논쟁을 즐깁니다.
왜냐면 논쟁에 지고싶지 않고 이겨야 내가 옳고 우월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이고 자존심이 이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게 지적할 때 뿌듯하고 뭔가 해낸 듯한 기분에 빠집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뿌듯함은 어디 가고 비참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인터넷 온라인상에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프라인상에서는 인격을 감추기 위해 이런 모습을 억지로 숨기지만,
온라인에서는 익명을 이용하여 추악한 모습을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수이지만,
거듭난 분들은 이와 반대로 글에 은혜받거나 동의하면
자동으로 아멘~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글이 있으면 읽어보고 그냥 지나칩니다.
증 할 말이 있으면
나는 이렇게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부드럽게
상대를 존중하며 권면합니다.
어느 날
글눈이 어두워 성경 자체를 잘 읽지 못하는 분을 대했습니다.
그분이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하니 믿음이 없는 분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온통 예수님으로 채워졌고,
입으로만 믿고 입으로만 사랑을 남발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묵묵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습니다.
아 나는 가짜였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성경을 집어 던졌습니다.
성경을 내 영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내 지식을 증명하고 만족시키는 도구였을 뿐
나는 지식만 추구한 철저하게 교만한 가짜였구나....
너무나 화가 나서 운전하다 말고 차를 갓길에 세운 후
엄청 울었습니다.
그 이후 뼈저린 반성과 회개를 한 후
며칠 동안 우울증 환자처럼 한마디도 안 하다가
성경을 지식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처음부터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다시 읽었습니다.
성경을 한번 읽는데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읽으면서 울고...
읽으면서 울고...
모양이 완벽한 음료수 캔을 발로 확 밟아버리면
납작 흉하게 찌그러지듯
제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저 찌그러진 캔이었고,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 이후 지식으로만 만났던 추상적인 하나님을
인격적인 만남이 무엇인지 체험하고 싶어서
주님 구하길 열심히 하였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제 상태가 딱 목마른 사슴이었습니다.
그 이후 제가 여러 칼럼에서 말씀드렸듯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온
너희가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성령으로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가 기록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배우고 누린 화려한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다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성경 지식?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다 소용없는 배설물입니다.
집사?
성가대 파트장?
주일학교 교사?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시간만 죽이는 배설물입니다.
그 봉사가 왜 배설물이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배설물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없는 내 의지적인 봉사는
내 만족이요,
인위적으로 쌓으려는 거품 같은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봉사가 주님이 함께하셔서
주님의 역사와 감동으로 해야 올바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교만으로 하는 봉사는 주님께서 받지 않는 배설물입니다.
내 만족일 뿐 결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알고 내가 행한 일이니
얼마나 허탈하고 속이 상했는지...
진짜 봉사는 내 자아가 아닌
주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게 진짜입니다.
내가 하는 봉사는 내 의가 들어가고,
내가 중심이 되기에 피곤하고 힘들지만,
주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봉사는
피곤함은커녕 기쁨이 넘치고 얼마나 즐거운지...
여러분~
지식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지식신앙에 갇히다보면
모든 신앙의 중심이 내가 되고,
타인의 모든 것이 내 생각에서 벗어나면
지적만 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교만함만 쌓이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신앙인은 내가 왕이 돼서 교만함으로 지적하지만,
주님을 만난 신앙인은 사랑으로 권면하게 됩니다.
지식신앙인은 내가 왕이 돼서 교만하게 정죄하지만,
주님을 만난 신앙인은 사랑으로 감쌉니다.
지식신앙인은 내가 왕이 돼서 봉사하지만,
주님을 만난 신앙인은 낮은 자세로 주님과 함께 일합니다.
지식신앙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단하게 여기지만,
주님을 만난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합니다.
지식신앙인은 자신이 중심이 된 자이기에 교만하지만,
주님을 만난 신앙인은 하나님이 중심이기에 매우 겸손합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교만하다는 말에 울컥해서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지
어찌 내 중심으로 하느냐고 반문하는 분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묵상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 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주인 삼고 나는 철저히 낮은 종으로 살았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께 내 삶을 드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를 죽였습니까?
진정한 회개함도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피를
내 구원의 도구로 이용하여 구원받았다고 자평하지 않았습니까?
순종도 없이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면서 나는 믿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 밖에서도 예배의 삶이 연속으로 이어졌습니까?
상대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분내지 않았습니까?
기도해주겠다고 공치사만 하고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주님의 사람은 기도해주겠다는 말없이 알아서 기도합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칫 지식신앙인들은 위의 것들을 행위로 정죄합니다.
저 위에 나열한 것이 내 개인적인 행위로 되는 겁니까?
행위로 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몇 번은 억지로 흉내를 낼 수 있어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힘들어하며 바로 바닥을 드러냅니다.
힘들어서 두손 두발 다 들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성령의 믿음 인은
결코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에
오히려 더더욱 뭔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이 없나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기에
불쌍한 이웃을 위해 뭐 할 일이 없나 기도합니다.
결혼 전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온종일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해 뭐든지 희생해서
다 해주려는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사랑의 분량만큼 비례해서 잘해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조건만 보고 사귄다면 결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척 잘해줍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조건적 행위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가 나를 주님만으로 가득 채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불량만큼 주님으로 채우고 순종합니다.
이런 참 신앙인은 하늘로 들어 올려 예수님의 신부로 같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무섭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았기에 지옥을 피하고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보혈피를
외치며 구원을 조건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구원을 사랑하는 겁니다.
대속제물을 통한 구원은
진정으로 통회하여 성령을 받고 거듭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지옥 가기 겁나서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조건적 사랑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어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에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지식신앙을 버리십시오.
물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중요합니다.
뭘 알아야 분별하고 대처하겠지요.
지식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없는 성경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물들입니다.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교만해집니다.
지식을 분별이 아닌 지적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지식을 권면이 아닌 정죄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지식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차라리 지식이 없었다면 지식을 이용하여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죄는 없었을 것을...
거듭남이 없는 성경 지식은 강도에게 쥐어진 흉기가 되지만,
거듭난 성도의 지식은 모두를 이롭게 하는 보약이 됩니다.
거듭남 없이 지식을 흡수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지 말고,
먼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우선하십시오.
베드로를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삼천 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삼천 명이
지식이 있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신앙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잘못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독이 될 수 있고
순서가 올바르면 교만한 지식도 약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디..................
지식으로만 주님을 알려는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지식조차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지식으로 정죄하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모두
다 내려놓으십시오.........
부디........
부디........
그리고
하나님을 지식이 아닌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인격적인 만남은 가공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이고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