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복음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선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눅6:20).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된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몰트만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이란 "배고픈 사람들, 실직자들, 병자들, 낙심한 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포괄"하는 집합개념이다. "그것은 예속되었고, 억압받으며 굴욕을 당하는 백성(ochlos)을 말한다." 가난한 자들은 병자들과 불구자들이며(마11:2-5), 할 일 없이 시내 거리와 골목에서 서성이는 자들이다(눅14:21-23).
그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다(눅6:21).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충분히 묘사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옷까지 빼앗아가고자 한다(마5:40). 가난한 자들은 가난 때문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과 내면의 삶까지를 부자들의 손에 맡기는 소외를 당한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얼굴이 없는 자, 노동력, 인간 자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실패자, 실직자, 낙오자, 국외자, 추방된 자, 억압받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 비인간화된 자들, 가진 것이라고는 알몸뚱이밖에 없는 그들에게 먼저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영적인 가난을 수반하지 않는 물질적인 가난을 부정적인 상태로 이해한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눅6:20)고 선언한 누가와 달리 마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5:3)고 선언한다. 마태와 누가의 이런 차이는 마태가 원칙적으로 영적인 가난에 관심을 가졌고 누가는 사회-경제적인 가난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차이는 이스라엘에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 이중적 특징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가난이라는 개념은 없어진다. 따라서 마태는, 한스 큉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누가에 의존해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누가는 마태 없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로 여김을 받았고,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는 칭찬했기 때문이다(눅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