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신학
강의 : 이현채 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대학교
요 한 신 학
제 1 장 : 서 론
요한복음은 유대적과 헬라적인 사상이 잘 융합된 사상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들을 유대적 범주로 기록한 것을 다시 헬라적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며 구원 얻는 길로 인도한다.
첫째. 요한복음은 완전히 유대인의 세계요 그것도 예루살렘을 중심한 남부지방으로 한정되었고, 이방인의 세계는 안중에도 없다.
4장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여준 진리는 유대의 특수 주의인 구원의 사건이 이방인에게도 같은 구원을 주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심이 본서의 특징이다.
둘째. 요한복음의 언어는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지만 셈족 언어이다(아랍어로 전승 되어 오다가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요한복음이 구약을 인용한 예를 보면 공관복음과는 다르다. 공관복음은 메시야 증언들의 모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역과 행하시는 모습들을 보아가며 골라서 인용한다.(메시야의 예언을 예수님께 증거한 그 증거들을 인용)
이런 점에 있어서 요한복음도 예수님의 수난사건에서는 공관복음과 같이 인용했다(로마병정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체의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뼈를 꺾어야 하는데 꺾지 않는 것).
그러나 그 밖에서는 그렇게 인용하지 않았다. 구약의 큰 절기인 출애굽과 같은 큰 줄기들은 구약과 유대교를 능가하고 그것들을 대치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에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헬라적인 배경(신비주의, 영지주의)으로 인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이 헬라사상에 젖은 신비종교 곧 자연신 사상인 사계절의 변화(봄, 여름, 가을, 겨울)로 식물이 죽고 난 후 다시 살아남이 신의 조화로서 이루어지고 생사를 신이 주장한다고 믿고 신이 동참하면 다시 살수 있는데, 이 신의 조화로서 신의 연합을 의식으로 보여준 것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요 6:5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다 하시니라").
헬라철학적인 사상은 풀 한 포기에도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 신과의 연합을 의식으로서 먹고 마심과 세례사상과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다는 말이나 성찬식 등을 헬라 신비종교 사상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사상인 학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 기록이 약 칠십 년에서 백 년 전인데 그 때에 헬라 사상이 성경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세기의 요한복음 주석가 볼트만은 헬라적인 배경인 신비주의와 영지주의로 해석하려 했다가 스스로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말 한데로 요한복음은 유대적과 헬라적인 사상이 잘 융합된 사상이다. 예를 들면 유대적인 아버지와 헬라적인 어머니 속에서 요한복음이란 아들이 태어났는데, 반쪽은 유대 아빠를 닮고 반쪽은 헬라 어머니를 닮은 것과 같다.
그리고 빛의 세계와 영의 세계인 이데아 속에서 물질의 세례로 올 때 빛으로 와서 영지 주의적 인간들과 몸의 파편들을 영의 몸으로 받은 자는 물질의 몸에 영혼이 박혀가지고 잠들어 있다고 보는데, 이때에 신이 다시 나타나서 암호를 발하면 그 비밀지식인 암호를 듣고 반응을 하는 것이 곧 부활인 것이다. 다시 살아나면 영혼들이 들을 수 있고, 깨어나면 그들을 다시 모아서 억압하는 악과 다시 싸워가지고 악의 세계를 이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처럼 헬라에 만연된 영지주의의 신화인데 바울과 요한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는데(하늘의 존재, 성육신, 사탄의 세력을 정복, 예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을 모음, 하늘나라에 귀환)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신화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의 대속과 부활로 들림 받으심으로 영광을 받아 재림으로 자기 백성을 모아 영원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신앙의 창시자로서 향도와 개척자 혹은 하늘의 백성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데 예수님이 개척하셨음을 역사화 했다(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등을 역사적으로 증명함).
문제는 신약 시대에 헬라적 배경인 신비주의적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헬라인들도 복음을 받아서 믿고 구원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조자연적인 능력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플라톤은 영은 위의 세상이요, 몸은 아래 세상으로 보고, 위의 세상인 영이 갇혀 있다는 것이다. 즉 영의 감옥이 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철학적으로 벗어나고, 지혜와 지식은 암호들로 벗어난다고 본 것이다. 흔히 물질인 몸에 갇혀 있고 늙고 병든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구원론은 영이 어떻게 몸인 육체 속에서 탈출하여 돌아갈 것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헬라적인 사고는 점점 몸으로 분리 되어져서 구원함을 받는다고 한다.(1970년에 신화 연구나 양식사학파, 종교사학파는 영지주의 신화의 열병에서 벗어났다).
2세기 이후 신비주의와 영지주의가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후 70년경에는 종교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헬라적인 배경이 있고, 유대적인 배경도 나온다(유대적인 배경은 구약의 구절들을 모집해 놓고 예수님의 행적 가르침을 조명하고 증명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과는 다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풍성한 은례를 구약 적으로 해석된 신학이 나온다).
* 요한복음의 제작을 세 가지로 본다.
1. 사랑받는 제자 사도요한이 공생애에서 일어났던 이적과 말씀들을 전승해서 썼다고 본다.
2. 제자들이 받은 전승을 기록했고, 기본적인 신학적 사상들 이 들어 났다고 본다.
3. 사랑받는 제자가 죽은 후 편집해서 기록했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도 요한이 아니고 장로 요한이라고 본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사도요한의 전승을 기록했던 것이다(마가복음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설교한 기록이다).
* 요한 복음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서론(1장 전체가 서론이다.)
2. 표적들의 책(2 : 1 ~ 12 : 50)
3. 영광의 책(13 : 1 ~ 20 장)
4. 덧붙인 말(21 : 1 ~ 25 절)
제 1장 서 론
1. 본서의 서론은 일장 전체가 서론이다.
1. 1장 일절부터 18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과 구원의 사건으로 표현하는데 로고스와 빛의 계시로 구원의 사건들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구약 유대교의 말씀 사건).
2. 1장 19절부터 51절까지의 증언들로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인식하고 예수님께 고백한 신앙고백들을 모아 주고 있다.
2. 표적들의 책
예수님이 보여주신 일곱 개의 행위가 구원자로서의 행위요 표적이다. 모든 표적들이 하늘나라의 진리에 대한 표적이지만 유대인들은 아래 세상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교훈하실 때마다 오해가 발생되었다.
1장: 서론.
2장: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 만드심과 성전에서 소란 피움 을 보여주신다.
3장: 니고데모의 모습.
4장: 고관의 아들을 고치심
5장: 1절로 15절은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병자 치료.
6장: 5천명 먹이심과 호수 위로 걸으심
9장: 소경의 눈을 고치심.
10장: 참 목자 상
11장: 나사로 일으키심 등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는데 이는 아래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5천명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였던 사건이 물리적인 행위이지만 대속적인 표적으로 위의 세상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배고픔을 해결함을 보고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의 기적으로만 보았다. 이것이 오해이다. 이 오해의 부작용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이시므로 위의 양식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요 진정한 안식이 됨을 알게 하기 위하여 표적으로 주신 것을 유대인들이 몰랐던 것이다.
2장에 가나 혼인 잔치도 그 표적을 3장과 4장에서 강해하심이요, 고관의 아들이나 5장의 베데스다 못의 병자도 16절 이하에서 강해하시므로 유대 지도자가 잘못 보았지만 예수님이 참 목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표적 강해 식으로 6장까지 해석하시다가 또다시 7장과 8장을 강해하신 후에 9장에서 소경을 고치시고 다시 10장에서 강해하심(7장 8장 10장은 9장의 설명이다).
11장에서는 생명주신 분이심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시니까 생명을 주고, 물위로 걸을 수도 있다는 표적을 주셨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표적이 아니고 물 가로 걸었다는 기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속에 들어가서 인간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나타나지 않은가? 문제는 신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니 안 보이는 것이므로 감추어진 것이다. 영원한 로고스인 말씀이 이 세상에 속한 육신! 연약한 인간이 라는 피조물이 되셨다.
1장1절은 하나님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사람의 연약성을 가진 인간이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시게 되었다. 창조주가 창조 영역 속으로 들어와 무한하신 분의 한계성에 들어 오셨다. 곧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람같이 보이고 성육신 된 것 같이 되었을 따름이라고 한다.(예수님은 사람에 속해 있다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떠나 버렸다고 한다). 이는 위험한 이단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전능 자) 원숭이를 놓고 사람을 계시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할 때만 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시할 때 구원이 일어날 수 있다.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계시와 구원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은 어느 한 쪽이 약화되거나 포기되지 않는다.
이는 중요한 계시와 구원의 문제이다. 그리고 계시는 항상 표적을 가지고 있다.(시간과 공간 속에서 말씀하고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행동과 언어는 신적 본질을 포함하고 계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말씀을 보여주고 전달해 주는 수단이다. 곧 말과 행동이 물리적인 것인데 영원한 하나님을 계시한 표적이다(전달의 수단).
요한복음은 성례와 성찬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해석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성례와 성찬을 배격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해석하며(신학적으로 인정함) 마력적인 오해를 없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자에게만 보여 진다. 하나님이 물질로 오셨는데, 그 물질이 신적인 것을 띄고 있고 신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 곧 표적이면서도 은유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 세상 종교는 지식(깨달음)과 실행이 중요하지만 기독교는 믿음과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닮아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믿음의 강요보다 순종이 더욱 강요되어 왔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갑자기 믿음의 강요를 받는다. 구약에서도 믿음이 강요되었지만 순종이 더욱 강요됨은 오시지 않은 예수님(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면 순종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이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사랑을 통하여 왔고, 그것은 표적 성을 가져오며, 영적인 진리가 있음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윤리적인 현상에만 머물면 안 된다. 때문에 믿음이 중심이 된다. 그러니까 물질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 그 때 순종이 아니라 믿음이 요청된다. 원래 이러한 뜻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심이다. 말씀과 함께 함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할 때 나타내심이 영광이다. 그것이 불기둥으로 나타나심이다. 그래서 물질에 말씀이 오셨으니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여기 빛을 마가복음의 증언들을 살펴보면 임마누엘이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날 때(영광) 아하~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 하는 명성과 의견 등 이것이 곧 영광이다. 하나님은 당신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일하신다. 곧 우리들의 일들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게 함이다. 이것이 곧 영광이다. 우리들은 찬송을 부르고 믿는 것으로 영광이 돌려 진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최고 인줄로 알고 있으나, 하나님이 우리가 드린 무엇을 받으시려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영광이다.
영광돌림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할 때 드러난다(찬양도 주권에 순종이다). 주권에 순종하면 우리는 옳은 일을 하게 되고 그 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옳은 일을 보고 우리 속에서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을 보고 느끼는 것이 영광이다. 영광의 기본 뜻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심이다. 옛날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은 죽을 고생이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심의 절정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과 그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게 하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된다. 그 때에 하나님의 본질이 온 땅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보이시고 육신적인 본질도 밝히 드러내셨다. 이를 누구든지 보고 알 수 있도록 보이신 빛이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고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고, 아들도 영광을 받는 것이다. 도마는 만져 보고 나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고백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지혜와 능력과 사랑 실천 그리고 선한 뜻에 전적 순종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즉 기독교 윤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아버지 아래에 아들이 있음과 같이 창조주 아래 피조물이 섭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윤리적인 것이며 일차적인 것이다.
이차적인 것은 우리가 삶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드림이다. 그래서 찬송은 2차적인 영광이다(우리 성도들은 찬양을 잘하지만 삶의 변화는 불신자들의 수준과 비슷함을 볼 수 있다).
여기 요한복음이 말하는 아버지로부터 나온 독생자라는 말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영원히 동행자로서의 아들인 독특한 아들, 하나밖에 없는 한번밖에 없는 독특한 관계로서의 아들이다. 성육신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건이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자기 백성에게 왔다고 증언한다.
여기 하나님 되신다는 것은 유대적인 사고로서 구약 적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헬라적인 면에서 신적 실체에서 진리이시다고 말한다. 곧 세상의 죄 많은 곳, 거짓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영원한 로고스가 육신 속에 들어오시므로 신적 실체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이다.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을 계시해 주며 하나님의 권세를 실행하셔서 우리의 왕이 되어주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니시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그의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시니라(요1;15)고 힘차게 외쳤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성육신 하신 분)이 자기보다 계급적으로 높으신 분임을 알리고, 여기 1장 15절에 "내 뒤에"는 시간적이 아니요 항상 있어 오셨기 때문에 로고스(말씀에 전능이 있음)로서 영원하신 선재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4절로 16절의 말씀이 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건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신적인 충만함으로부터 받는 은혜야 말로 구약적인 은혜 위에 더 큰 은혜인 것이다.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의 내용은 율법이란 것이 모세를 통해서 왔지만 구약에서부터 언제나 도우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에 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는 변함없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구약에서 주셨던 은혜보다 훨씬 더 큰 은혜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주신 은혜는 시간적으로 지나갔으나 예수님 안에서 연속성으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전체 뜻이요 예수님이 성취하시고 계심을 강조하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베푸심이 유대교를 능가한다고 힘주어 가르친다. 구약 적으로 잘 믿는 대표자 니고데모도 그대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구약을 대치하시고 성취하셔서 능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성전 중심한 유대교는 혼인잔치에 포도주 떨어진 것과 같이 흥이 깨어진 잔치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흥이 깨어진 잔치를 더 맛있는 포도주를 내셔서 흥을 일으켜 주시므로 성취하신다는 증언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요한복음 1장 16절과 17절에서 언약의 성취로서 유대교를 대치하고 능가함을 보여준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복음을 사도 요한이 정리할 때 예수님의 교회와 유대교를 서로 비교하고 흥이 깨어진 유대교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주가 되시니 유대교의 자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는 요한복음의 전체의 결론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구약 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본다. 헬라 적으로도 그렇다. 모두가 보이지 않은 초월성을 말한다. 사람의 이성으로 터득되어지고 좌지우지 못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한 것만큼만 보는 것이다. 터득되어 본다면 우리와 같거나 작다는 것이요 곧 우상이다.
우상 종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하나님을 자기 말 잘 듣는 자로 만들려는 시도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음이 잘못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로고스가 하나님이라고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하나님으로 마치고 있다.
* 이 말씀 ---> 계시가능 ---> 성육신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도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꾸 무엇을 보려고 찾아가는 쪽으로 가다보면 인본주의가 되기 때문에 잘못이다. 무엇을 보려고 하지 말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 속에서 단어를 찾고 그 단어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인 신의 성품에 참여함을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9절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는 당시 메시아의 다양성을 볼 수 있다.
신명기 18장 15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 이는 제 2출애굽 역사를 기대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이 고조되었다.
예루살렘의 대표자들이 사람을 보내어 세례요한에게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다. 22절에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는 부탁을 받고 23절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느니라."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고 있다고 한다. 이때에 그러면 왜 세례를 주느냐(1:25)에 26절에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절에 "나는 그의 신 들메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고백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33)고 세례요한은 증거 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우리를 위하여 구속하실 메시아로 확실하게 증거 한다(29). 그러나 유대인들은 갑자기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다. 멜기세덱처럼 오셔야 되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를 거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그의 출생 년 월일도 부모도 없이 갑자기 올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세례요한에게도 아무런 대접이 없었음).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머니도 알고, 형제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시야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복음을 증거한 세례요한은 첫날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님을 알리고, 이튿날은 29절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언한다. 36절에 증거 한 구원 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 36절 어린양의 뜻을 두 가지 의미에서 분리해 보자.
1. 유월절 양 : 요한복음 19장의 만찬 준비 때 떡을 떼신 떡이요, 14일에 도살된 제물의 양이다. 이 날을 공관복음에서는 15일로 표기하고, 요한복음에서는 14일로 표기했다.
출애굽 할 때 문설주에 바른 양피로서 피 바름이 없는 집에 재앙이 있고, 피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유월했던 것이다(넘어감). 이렇게 유월절 양의 피가 속죄의 의미와 만찬의 의미(고기를 먹음)로 시대를 따라 계속해서 내려오다가 마지막 만찬에서 만찬의 의미로 굳혀졌다. 즉 속죄의 의미보다는 만찬의 의미로 드러난다. 예수님 안에서 먹고 마심으로 명확화 한 것이다.
2. 어린양 : 이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드린 어린양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이삭은 유대 구원론에 중심이다. 모리아산에 결박된 이삭을 대신하여 바쳤던 수양을 예수님으로 볼 때, 구원이 일어나며 메시야로 받아드린 양이 본문의 어린양이다. 26절에 요한이 회개와 목욕시켜 준비함은 메시야를 기다리게 함이요 준비케 함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구원이 없다. 다시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제자들에게 받은 세례는 믿을 때에 성령님을 모시는 세례이고,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세례이다).
공관복음과 같이 세례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요약하고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1:36)
요한복음 1장 32절로 34절에서 세례 받으시는 모습을 보이시며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 세례임을 소개하고 요한복음 1장 37절에 와서 세례요한의 증거가 효력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된 증거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제자가 되게 만듬이다. 여기 따랐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따라 다님과 영적으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증거는 결실을 해서 따르게 함이다. 이때 예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르십니까?(38) 하니 단순한 장소와 영원한 소식을 묻는 질문에 답하신 것이다. 39절에서 계신 곳을 보고 ‘함께 거하니’는 완전한 제자가 되었음을 말한다(10시부터 다음 10시까지 완전한 하루를 말하고, 10은 완전수로 완전한 하루, 완전한 제자 됨). 40절에서 제자로 따르던 요한이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이 제자가 되어 메시야를 증거하고 여러 제자들이 확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요1:40~51)
예수님 이전의 메시야는 보통명사로 선지자나 왕에게도 붙여 쓰는 일이 있다. 고레스는 포로를 귀환시켰다고 메시야로 본다. 즉 구원 사에 쓰기 위하여 기름 부은 자에게 보통 명사로 메시야라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하나 밖에 없는 메시야로 본다. 그리고 제자들이 전도해서(형을 안드레가) 예수님께 왔을 때 게바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마16:18)
이는 성자 하나님께서 구원사에 수행해야할 임무를 보여 주심이요, 곧 그 사람의 사역의 의미를 나타내 주심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교회를 짓겠다고 주신 이름이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 질문하심은 사역하심의 부록이다.
요한복음 1장 43절에서 보면 이튼 날에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은 45절에서 빌립이 친구를 전도하게 된다. 그는 친구를 찾아가서 구약이 예언한 그 분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는 한결같이 예언했던 메시야! 아주 특별한 의미로 하나밖에 없는 그 분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고 복음을 전한 것을 본다.
이는 빌립이 우리로 하여금 도전을 준다. 제자의 도는 항상 증거가 있어야 하고 열매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사명 즉 제사장이 이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자는 증거 하여 믿게 함이 있는가, 없는가가 증명해 준다. 그 누가 세워주고 인정해 주고 대접해 주는 곳에 있지 않고 내가 증거 하여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맺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빌립과 안드레는 올바른 제사장임을 보여준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별을 따라 가려는 자나 구유나 마구간을 찾으려는 자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증거 하여 제자를 삼아야 한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은 자는 성경에 능한 나다나엘이었다. 복음을 듣고 무슨 소리냐? 베들레헴이 아니냐? 46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니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선입관을 접어두고 교회에 나온 후에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여기 본문에서 본다는 것은 성경을 깨닫는 것이다. 보통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다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따른다. 성경을 다 깨달으면 예수 안 믿을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하셨다. 여기 "와 보라"는 말씀은 단회 적으로 혹은 교회에 한두 번 나왔다가 집에 가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와 보라"는 예수님을 보라는 것이요 예수님을 보는 것은 성경 전체를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47절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다. 가짜 이스라엘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고, 요한복음 1장 48절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알았다고 대답하신다(무화과나무라는 숙어가 전통적으로 무엇인가는 고고학자들이 새로운 사본을 발견하면 풀릴 수밖에 없으나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추리한다).
요한복음 1장 49절에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시고(51절에서) 아멘을 서두에 쓰시고 계신다(진실로가 아멘으로 번역되어야 함).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라고 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시지 않고(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아멘 해라 하시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의 그 자리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라" 혹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어법은 모세를 능가한 계시자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만드시는 입법자가 되신 것이다.
공관복음은 아멘이라 한번 하시고 말씀하시지만 요한복음은 아멘 해라 아멘 해라(진실로진실로) 반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의 특징은 아멘을 많이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가라사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51)에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보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다가 듣는 청중을 오늘 우리에게로 돌리시고, 너희에게 이르노니 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은 하늘이 열림의 장면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1.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2.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 하심을 보시더니(마3:16)
3.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 과 같이 희어 졌더라."(마17:2)
위의 구절들은 하늘이 열린 모습들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1장은 전체가 서론이며 요한복음 1장 51절은 전체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함이다. 14절도 전체의 뜻이다.
다니엘 7장 9절로 14절과 특별히 12절에 한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가 구원을 성취 하는데 곧 예수께서는 부르심의 초대에 응한 자들에게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 것이 보증되는데 그 증거로 잔치를 가지신다는 이 언약이 새 백성을 창조하심이다.
다니엘의 예언에 따라 그 사람의 아들이 보좌에 앉으시고 그 아들이 오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초대하며 재창조(중생)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옛 야곱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고 참 이스라엘은 나다나엘이다.
나다나엘 같은 자가 참 이스라엘이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옛 야곱의 성질은 이스라엘이 아니다.(이스라엘이란 칭호를 주기 전) 긍정적으로 말하면 나다나엘이 이스라엘이다(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한 자로서 이스라엘이다. 야곱은 천사로 보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세상 메시야를 기다렸다. 예수께서는 대속과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도록 대속의 제물로 통로를 만들고 성취할 분으로 오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장 51절은 본론이면서 결론이다.
곧 하나님을 계시하고 회개와 믿음을 주시지만 유대인들은 스스로 암흑의 자녀를 택하여 옛 야곱의 자리로 들어갔다(직접 하나님을 보지 않고 천사를 통해서 보는 야곱과 같음). 예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신 분이요. 야곱에게 주셨던 믿음의 족장이라는 이스라엘의 명칭을 야곱에게서 가져다가 나다나엘에게 주신 그분이 성육신하신 분이요.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참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려고 오신 분인 것이다.
이 때 유대인들은 참 이스라엘의 백성을 모으시려는 메시야를 거부하고 세상의 대표로 세우고 싶어서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우리가 알 것은 유대교에 능한 니고데모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니고데모도 조상 야곱만 보았고,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야곱을 붙잡고 야곱을 소개하지만 예수님이 야곱과 그 우물을 지금까지 먹어 왔으나 죽었으며 앞으로도 죽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하늘의 있는 샘을 주려고 왔는데 네가 그 물을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야곱과 그 우물을 대치하겠다고 하시고 주께서 주신 우물은 뱃속에서 생수가 흐르게 하고 "이 땅에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 왔지만 원죄와 스스로 범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생명이 영원한 하늘의 생명과 연결시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한 수가성의 여인 속에 내주하시므로 그 속에서 생수가 흘러 넘치니 그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 많은 영혼들에게 값없이 돈없이 사는 생수 인도했던 것이다.
제 2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과 성
전에서 제물 팔고 사는 문제
요한복음 2 장은 첫 부분에 새로운 시작과 종말의 구원의 구원 즉 새 창조를 보여 주시고 이어서 성전을 찾으시고 성전의 의미를 깨우쳐 주신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1,12,13 연계의 다리 역할).
요한복음 2장에는 두개의 이야기와 두개의 강해 설교가 들어 있다. 그런데 위의 사건들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과 4장의 내용이 2장의 내용을 해설하는 강해이다. 그러므로 3장과 4장의 설교 혹은 강해들은 2장의 의미로 해석해야 바른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 포도주
첫 번째 표적은 포도주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며, 이 사건의 무대를 준비하는 주인공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여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19:28-30; 7:30; 8:20; 12:23, 27; 13:1; 17:1). 즉, 첫 번째 표적이 십자가 사건까지의 일들을 수렴하면서 그 절정을 예시하는 것이다. 첫 번째 표적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절정이며, 예수님께서 표적들을 통해서 자기 계시를 하는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참여자가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0-31)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표적 직전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메시아이심을 통해서 고백하게 하며(1:41), 나다나엘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언하고, 이어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면서,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51)라고 선언한다. 이 천사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등장하는 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20:12).
첫 번째 표적의 결과에 대한 반응은 다른 표적들의 반응들과는 다르며, 여기에서는 잔치 참석자들이나 대중들의 반응이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표적의 결과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마지막 표적인 부활 사건에 대한 갈무리도, 예수님을 "믿는" 반응을 요구한다. 결국 첫 번째 표적인 포도주 사건은 가장 좋은 포도주인 마지막 표적을 예고하는 것이다. 즉 혼인 잔치 집에서 먹지 않던 포도주를 드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3년 전에 아꼈던 가나 혼인 잔치의 묵은 포도주인 신 포도주를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19:28).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갈증을 토로하시는데, 이는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하는 의도적인 갈증이며 이 갈증에 기초하여 결국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후 그 영을 건네주신다(19:30). 요한복음서의 본문만을 가지고 볼 때, 비록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지만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의 "때"가 이루어졌음을 드러내 주며, 그의 죽음의 시간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cf. 마 26:29; 막14:25; 눅22:18).
본문의 내용은 가나의 혼인 잔치로서 유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혼예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사를 통해 요한복음 1장 14절의 예고에서 밝힌 것 즉 육신 안에 내재하신 성자 하나님의 본체를 들어 내셨다.
위의 사실을 물질적인 행동이지만 영원한 로고스의 모습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래서 표적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신다(본질의 표적).
예수님이 영원한 주권자이신 신적인 모습을 나타내실 때 이를 표적이라고 한다(이 표적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3장, 4장에서 새롭게 설명하신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를 통한 예수님의 교훈은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종말의 잔치로 설명을 하신다. 이 배경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는 즐거운 잔치와 같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요한 계시록 19장에서도 천국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제한된 생명과 제한된 만족과 평화와 제한된 사랑으로서 무한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모든 결핍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하신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잔치를 베풀고 초대 행위를 통해 하나님 자녀를 삼으신다.
예수님의 초대 행위의 절정은 마지막 잔치인 만찬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만찬은 교회의 성만찬으로 발전하여 우리들이 재림을 소망하면서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실 것을 기념하고 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2:22).
이는 유대교라는 기존 틀과 부대를 사용하면 무너진다는 교훈이시다. 새 틀, 새 부대와 새 포도주가 생겨야 함을 보여 주시므로 유대교를 대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이렇게 틀과 부대와 포도주를 모조리 바꾸시는 것은 유대교는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대속하실 피의 권세로 세우실 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백성을 모으신다는 진리이시다.
본문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는 유대교의 심장과 같은 성전으로서 제사 중심을 말한다. 성전이 가지고 있는 청결의 조건이 결례이다. 그런데 그 결례를 따라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떨어질 때까지 예수님이 기다리심). 포도주가 떨어짐은 흥이 깨어졌다는 것이요 곧 유대교가 생명과 흥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포도주를 만들어서 진정한 잔치를 이루시고 분위기를 고조시켜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가져올 자이심을 보이시려고 물로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던 것이다. 좋은 포도주에는 잔치 마지막에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는 통상적인 법을 떠나 흥이 나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포도주로 인하여 가나 혼인잔치가 기쁨과 생명이 넘치듯이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려 죽으면 그 죽음을 통해서 구약과 유대교의 잔치가 주지 못했던 구원을 가능케 될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생명운동을 예고하신 표적이다.
생명과 흥이 다 깨어진 것을 예수님께서 종말의 메시아적인 구원을 가지고 오셔서 잔치로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능가하고 대치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말의 메시아적인 잔치를 가지고 오심이 자신의 피 흘림을 가지고 오심이요 이 사실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이고 믿으니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신 것이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몰랐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신가?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고 대치한 예수님이시요 대속의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성취하신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혼인 잔치가 첫 번째의 표적인 것이다. 즉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결혼의 주례자이신 분이 육을 입고 오셔서 주례를 하고 계신 것을 제다들만이 알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첫 표적인 것이다.
(2) 여자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함께 "여자여"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십자가 위에서 또다시 포도주와 함께 이 호칭이 등장하며 가나에서와 달리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셨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는가? 단지 요한복음만이 우리에게 이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설명할 때 에덴에서 재판을 통해 여자의 후손을 연상시킨다. 본문은, 이러한 호칭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여자여"라는 호칭이 지금의 우리 사회와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자간에는 어색한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수님께서 비록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십자가 위에서 한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여자여"라고 부를 뿐이다(2:4; 19:26). 또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 어머니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단지 "여자여"라는 호칭과 관련하여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그가 사랑하던 한 제자에게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는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며, 평범한 어머니로 자리를 잡는다. 그녀의 역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천주교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여자여"라는 호칭이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적용되는 구절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20:13, 15). 초림의 예수님보다 재림의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우리가 더욱 큰 은사라고 볼 수 있다.
"여자여"라는 호칭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근거로 여겨진다면,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어머니와 같은 임무 부여에서 제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관련하여, 빈 무덤 앞에서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며(20:13), 예수님 또한 그녀를 "여자여"라고 부른다(20:15).
예수님은 자신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을 "여자"라는 어휘를 통하여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에덴에서 재판하시는 법정에서 여자의 후손이 여기에서 강조된 것이다. 즉 메시아라는 표적이 첫 번 표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어머니"칭호를 생략하고 ‘여자여’라고 함으로 마리아의 위상을 높여 준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출생과 관련한(1:14) "여자"는 첫 번째 표적인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더불어 등장하며, 두 번째 출생과 관련한 "여자"는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인 부활 사건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반복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그의 어머니를 또다시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녀와 그를 따르던 한 제자와의 관계를 "어머니-아들"의 관계로 새롭게 설정해 준다.
(3) 사흘째 되는 날
사도 요한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이 "사흘째 되는 날" 발생했다고 소개하고 있다(2:1). 요한복음서에서, 이 "사흘째 되는 날"이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더불어 활동을 시작하며, 처음에는 "태초에"(1:1), "이튿날"(1:29), "다음날"(1:35, 43)이라는 표현 등이 등장하다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을 언급할 때 "사흘째 되는 날" 이라는 순서적인 언급을 지속하다가(2:1), "첫 번째 표적"이라고 구체적인 표적의 횟수를 드러내 주는 표현을 사용한다(2:11). 단순히 사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튿날"(1:29), "다음날"(1:35, 43) 등등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특별한 기준점이 없는 상황 속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의 의도적이다. 특별히, 가나의 포도주 사건 뒤에 이어지는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반복하시면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2:19). 요한복음서에서 이 성전에서 자기를 계시한 사건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사흘째 되는 날"과 "첫 번째 표적" 그리고 마지막 표적인 죽은 후 사흘만의 부활에 대한 예고가 등장하며, 첫 번째 표적이 드러날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여자"로서 무대를 장식하고, 마지막 표적이 드러날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그 표적을 증거 한다.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2:11). 마지막 표적인 그의 부활 후에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2:22). 그래서 요한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이다(20:30-31).
(4) 곧 피와 물이 흘러나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병사 하나가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이에 대해 요한은 새삼스럽게, 목격한 대로 증언했으며, 이 증언은 진실이라고 부연하므로, 이"피와 물"의 흘림에 대한 이론(異論) 발생을 사전에 제거하고 있다(19:35). "피와 물"은 "육과 영"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 데, "피와 물"의 쏟아짐은 예수님의 영의 건네줌과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셨으며(1:14), 그 영은 예수님 위에 머물렀으며(1:32-33), 이 육과 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피와 물로 상징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그 영은 예수님 위에 머물렀으며(1:32, 33),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바로 그 영을 건네주신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니다(6:63). 그래서 물과 성령[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3:5-6). 이 영은 성령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는, 즉 영광을 받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으며(7:39), 다시 살아나신 후에 우리에게 주시는 영이다(20:22).
예수님이 받은 영은 그의 죽음 뒤에 신자들에게 줄 성령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7장 39b절에서 비록 영이 이미 예수님 위에 내렸지만(1:32) '아직 성령이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은 '파라클레토스'가 아니며 성령이 '파라클레토스'가 되는 것이다. .... 세례 요한도 1장 33절에서 '영'과 '성령'을 구별하고 있다. 즉, 누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표적으로서 '영'의 내려옴과 그에 의해 오게 되는 '성령'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되지 않고, '파라클레토스'로서 성령 강림[20:22]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흘러내리는 "피와 물"은 가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항아리와 같이, 자신을 완전히 비운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주며, 새로운 포도주를 제공해 주는 근원으로서 다시 살아나는 표적의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빈 항아리의 물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고 새로운 창조인 포도주를 보여 주신 영적의미가 있다.
(5) 예수님의 반응
예수님은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여자여"라는 호칭과 예수님의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라는 말씀으로 인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더욱이 뒤이어 발생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과는 다르게 보여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있도록 빈틈없이 훌륭한 조연 역할을 한다.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려주며(2:3),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민첩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에 대한 무관심과 아직도 특별한 일을 할 순간은 아니라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경솔한 요구를 책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의 일관된 입장과는 달리 뒤이은 포도주 사건에 의해 때로는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음은 "예,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의 때가 왔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곧이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때"는 어떤 종류의 일이 발생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영화롭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는 사건과는 관계가 없을까? 요한복음에서 드러난 본문만을 가지고 볼 때,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내용이 없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서에서는 최후의 만찬 사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는 기록은 단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현장에서만 등장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 26:29; 막14:25; 눅22:18)라는 말씀과 달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밝힌 요한복음은 들림이 예수님의 생애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되듯이, 그의 "때" 역시 이미 시작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포도주를 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을 하신다.
2. 성전에서 재물 팔고 사는 문제(2:14~19)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매매함을 금하신 것이다(제사용). 많은 분들이 성전 청결이라고 하고 다른 뜻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해서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전 매매 행위는 제사장이 제주가 되는 순례자의 편익을 위해서 취한 공식적인 행위이다. 이를 거부한 단체는 쿰란 공동체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주장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사단의 집단이 되어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거하시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고, 빛의 자녀라고 말하며, 자기들의 공동체(쿰란)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건축할 때 천사들의 도움으로 정화된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계시던 예루살렘은 약 20만의 인파 속에서(평소에는 예루살렘의 상주한 인구는 약 5만인데 절기에는 순례자들 때문에 약 4배가 된다). 성전을 향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하시니라." 즉 심판으로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면서 새 성전을 약속하셨다(막2:22의 파괴는 요2:19의 새 성전 약속을 두고 하심이다).
이를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하여 파괴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가증스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하신 것은 제사가 없는 완전한 제물이 되시겠다는 것으로 신령과 진정한 예배의 도래를 가리킨 것이다.
이 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아셨다. 사고력을 잃은 행동을 시도하시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곧 장사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이기신 것을 보면 놀랄 사건이나 지위나 돈이 많아서 순종함이 아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구약 성경에 잘못된 의미로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하나님을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 하더라고 했다(요2:7).
위의 본문에서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말씀은 요나서와 호세아서 6장 2절에서 온 말이다. 예수님이 손으로 짓지 않겠다는 것은 건물을 말씀하심이 아니며 곧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체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교회이고 건물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인 것이다.
아담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피조물들이 다시 한번 창조주에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것이 바로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이다. 이러한 성전을 성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인데 이를 성전 청결이라 함은 성경 전체를 왜곡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킴이라 하였다.”
* 성전 된 육체의 의미.
(1) 십자가에 달리고 장사되고 부활된 몸(구속).
(2) 하나님의 본체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신과 피조 물의 만남인 교회).
성만찬에서 예수님이 떡을 들어 말씀하실 때 몸을 분별치 않고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몸이 어떤 몸이냐? 손으로 들고 계신 떡으로 표징 하려고 하신 몸인데 위의 1번의 몸이다.
또 하나는 바울이 깨달은 의미로서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했는데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몸이다. 고린도 교회(고전11장)에 바울이 책망한 사실은 교회란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우리는 그 머리에 붙어 있는 몸으로서 하나의 지체임을 밝혀주었다. 이렇게 지체 의식으로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지체 의식이 없으니 성찬식을 통해 과식과 과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과식하고 먹고 마시는가 하면 없는 자는 얻어먹으려고 하니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너희가 그리스도 몸이냐? 너희가 교회냐? 라고 물으시며 몸도 교회도 아니라고 책망을 했다.
예수님은 쫓아 버린 제물 대신 바쳐질 제물이시다(사 53:1-6).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 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곧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사와 언약의 제사요 옛 시내의 제사요 예레미야에게 예언하게 한 새 언약의 제사이다.(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전의 기능을 성취하였음을 말한다. 진짜 제물(자신의 몸)이 있으니 가짜 제물(소, 양, 비둘기)이 이제는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곧 물질시대에서 차원 높은 영의 수준인 본질에 이르게 되는 시대를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림자요 모조품 같은 것들을 쫓아 버리고 실체이시며 진품이 오셨으니 이제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표적이 성전 소란 피움이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네가 말하는 그러한 메시야라면 표적이 있을 것이니 표적을 달라하였다. 요한복음 2장 18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에 19절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면 성전이라는 구원을 가지고 온다고 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것 외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어떤 것을 표적으로 보이라고 한다. 밑에 있는 세상! 물질적인 세상에서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자유로 로마에서 해방을 이루는 표적을 달라하지만 예수님은 위에 것을 보이시고 구원에 참여케 하는 것을 보이신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우리들은 그것을 보는가?
* 성전에 대한 두 가지 면
(1) 긍정적: 성전 중심한 유대교가 하나의 그림자로서 모조품
을 가지고 표징하려 했던 것, 곧 구원을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분이다.
(2) 부정적: 성전 중심한 유대교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가
짜) 그 수준에서 구원을 요구한 자에게는 그것을
대치한 자로 오신 분이다.
위의 두 가지 면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과 4장에서 다시 강해하시면서 보여주신 것이다.
제 3 장: 니고데모와 중생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통치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요3:10) 소개 된다. 유대인 중에 가장 고상한 자요 진리에 대한 진정한 추구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모세의 율법을 교육해 주는 자이다. 그렇다면 율법 교육이 무엇인가? 이는 예수님을 알게 교육했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할렐루야! 예수님이시다. 라고 영접할 수 있는 교육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계시 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오신 예수님을 자기도 모른다. 오신 예수님을 니고데모는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이런 경우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이유를 밝히실 때 거듭나지 않음이라고 지적하신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아멘해라)진실로 (아멘 해라)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 갈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하나님), 위에 계셨던 분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구원을 선물로 줄 수 있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온 예수님에게만 자기백성을 모을 수 있고 예수님만이 다시 하늘에 가실 분이시다는 교훈이다. 곧 위에서 주셔서 받은 영이요, 그 영을 주신 분이 당신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힘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지 못한다. 곧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사람 니고데모도 그 틀 안에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곧 물질의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 새로 거듭나야만 된다. 이는 곧 니고데모와 우리 모두에게 문제의 한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이 세상의 모든 종교 모든 지식 모든 과학으로도 되지 않음).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아니요 위에 세상에서 누구인가 오셨으면 그 분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 분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시면 이것이 곧 은혜의 사건이요 사랑의 사건이다.
니고데모가 진실로 알아야 할 것(위에 것)은 깨닫지 못하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자로 새롭게 날 수 있을까? 하니 왜곡 되거나 절반만 깨닫게 된다. 이럴 때 오해가 발생하고 발생한 오해를 예수님께서 긴 설명을 통해 해석 하신다. 그렇지만 설명에서 또 다른 오해가 발생한다.
요한복음 2장 5절에 예수님께서는 아멘 해라! 아멘 해라! 하시며 다시 설명하신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아멘해라) 진실로(아멘해라) 네게 이르노니(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시고 위에서 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상징적으로는 세례이다. 위로부터의 새롭게 태어남을 극화한 것이 영이니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시고 "바람이 임의로 불 때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8절에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오해를 없애려고 바람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모세의 율법에 능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로 설명하신다. 놋으로 만든 뱀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물리적인 행위와 이차적으로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 주시면서 요한복음 2장의 두 표적을 강해하고 있다. 이 진리는 선입견이 있으면 한 없이 어렵고 힘들지만 이를 그대로 믿으면 아주 쉽다.
우리는 쉬운 방법으로 믿는 자가 되자. 위에서 나는 것은 아래 세상에 있는 우리가 아무리 힘써도 우리끼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오직 하나님 만 하시는 주권자적 행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나는 위에서 났고 다시 위에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가실 때에는 의미 없이 가시지 않고 다리를 놓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수기 21장에 나온 것을 요한복음 3:14절에 인용하시며 들려야 한다고 하시고 이유는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다리를 놓으신 것이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처다 봄이 무엇이냐? 구리 뱀의 연구 끝에 1)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과, 2) 하나님께 순종하고 바로 보아야 된다는 해석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예수님을 예표 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지금의 랍비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니고데모 같은 자도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본장의 니고데모는 나중에 구원 받은 모습을 보여준다.
* 요한복음 7장 50절의 구원은 위에서 오는 힘이라야 하며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지식의 힘으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올리심이다(그 사람의 아들).
* 이사야 7장 14절은 윤리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적으로 높임 받는 영광은 자기 백성의 모음을 말한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새 언약을 세우심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위대한 천명인 것이다.
* 다니엘 7장 13~14에 보면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 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예언 되었다.
* 이사야 42장부터 53장까지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예언했고 대속으로 성취하심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며,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을 상속받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모세 시대는 놋 뱀이지만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아들을 내어 주심의 사건과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몸을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감의 사건이다. 단순하게 장대 위에 들린 정도가 아니라 영광의 보좌 위에 계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믿으면(단7:13~14, 사7:14) 그것이 곧 구원의 방법이다.
인간의 삶 속에는 구원이 없다. 본 장에 나타난 니고데모는 가장 이상적인 공회원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로 나왔다. 이제는 예수님을 위에서 오신 분!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분으로 믿으면,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믿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인간의 결핍으로 오는 고난의 삶은 아들을 믿음으로 형통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신다. 이는 곧 위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기를 위한 대속의 죽음) 터득한 자에게 주신다.
니고데모처럼 율법을 터득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거룩해서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니고데모로 가득 차도 구원은 없다. 요한복음3장 16절은 내어주신 아버지와 보냄을 받아 오신 아들을 보여준다. 로마서 8장 32절에서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셨고 갈라디아 2장 20절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으며 또한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그 징조로 아들을 보내 주심과 보냄의 형식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자기가 보냄 받은 아들로 그림을 그리시고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는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로 소개하신다. 보내심과 내어줌의 형식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2장 20절도 마찬가지다. 사랑하사 곧 사랑이 강조된다. 이 보냄의 형식은 상속자로 전권대사로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로서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나타내는 자, 곧 계시자이다. 요한복음의 중심 기록은 보냄 받은 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그 안에 구원이 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림! 그것을 바라봄이 구원이요 그것이 구약과 유대교의 완성이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지만 믿는 자들만 구원이 있다.(모세시대에는 보는 자이다. 뱀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뱀을 바라보았던 자들이 구원을 받았다) 영적으로 생각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과 물리적인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소개하시고 압바(Abba)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이는 아들(자기)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압바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거부하고 암흑을 선택하니까 심판을 스스로 받게 된다.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자는 구원이요 거부하는 자는 죄를 확정, 곧 정죄라는 심판을 받는 자가 된다.
계시의 빛에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암흑을 선택함이다. 요한복음 3장 31절로 36절은 위에 것의 요약이다.
제 4 장: 사마리아 여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서로 마찰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까칠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중에 생명의 물을 약속한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수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1) 지하수처럼 솟는 생수(움직이는 물로 식수).
(2) 영생을 주는 물이다(영혼의 물로 성령님작용).
사마리아 여인도 니고데모처럼(어떻게 두 번 나는가) 두 번째 의미에서 오해가 발생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알아듣지 못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긴 설교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을 주는 물(성령님)이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너에게 줄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 본문의 여기 우물은 우리가 아는 우물이 아니고 사막을 의미 있게 하는 오아시스의 개념이다.
우물이란 한 부족의 생명을 보존케 하며, 자손들이 이 우물로 생명을 이어간다. 이 야곱의 우물을 자손 대대가 먹고 살아온 것이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을 조상으로 섬겼던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야곱이 준 물을 먹고 지탱해 왔는데 이러한 야곱보다 당신이 더 크냐고 질문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까지 먹었어도 죽지 않았느냐? 고 반문하시고 내가 준 물은(결핍이 없음)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영원한 물 결핍이 없는 것은 신앙이므로 이어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 처소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통성을 주장한다.
요한복음 4장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 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인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예배 처소의 증거물로 정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배는 처소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정통성의 시비에는 잠정적인 정통성을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나서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예루살렘 성전에도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계시와 구원이 완성 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신다. 즉 성전의 기능으로서 예수님이 언약 백성 안에 계시고 그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 이것을 요한복음 2장에서 표적으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짐승을 바쳤던 성전의 제사는 끝이 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시는 계시에 힘입어 위의 세상에 있는 그 힘으로 예배하는 자, 가짜가 아닌 진짜의 차원에서 교제하고 예배하는 예배가 가능케 된다고 오해를 설명 하신다. 이는 아래 세상의 물질적인 암흑세계에서 그림자를 제물로 드리는 가짜 제사가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하심으로 새로 난 자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함이 가능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의 그림자이며, 짐승 예배는 모조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의 공로만이 진짜 예배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는 것은 가짜 생명, 가짜 물과 가짜 샘인 야곱의 우물이요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영원한 물이요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다 순종 할 수 없다. 또한 뜻을 다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예수님께서 성취하시려고 아들의 자격으로 오셔서 완성을 가져오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을 비유컨대 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6장에 나온 떡도 구원의 사건을 증거 함이요 먹고 마심이 생명을 연장시킴이요 위에서 주시는 생명을 사마리아 여인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이해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설명을 하셨다. 여인과 대화를 위해 우물이 야곱의 후손을 살려 주었음이 사실이요 율법이 하나님을 알게 함도 사실이지만 그림자로서 지적하려고 했던 것뿐이요 그 완전한 계시를 예수님이 가져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은 2장에 나오는 두 표적들을 밝혀주시기 위한 강해로 해설을 하셨다. 유대교는 생명을 줄 수 없다. 결혼식에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짐과 같다. 성전제사란 무엇인가?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예표하고 제사가 예배를 예표 했다면 이제 실체가 온 후에는 필요성이 없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사로 새 언약을 세워서 구원하심을 당신이 오시기 전에 먼저 그림자인 성전제사로 보여주셨는데 그 이후로 예수님을 유대교가 예표 하려 했던 그림자 같은 그 자리에 실제인 진리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다고 3장에서 말씀하심인데(위에서 남) 요한복음 4장에서는 3장보다 한마디 더 하셨는데 그것을 완성 하시므로 말미암아 야곱의 우물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말씀과 정통성 있는 곳에만 구원의 은혜가 있음이 아니요 사마리아인(남편 6명이 있어도) 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약속하심으로서 타락한 백성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셨던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이것까지 말씀하셨으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떠났다고 생각함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더 큰 오해를 유발시켰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고상한 유대인니고데모에게나 4장의 죄인의 대표자요 사마리아인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 받는 것을 확실히 하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신학이다. 가장 비천한 자나 가장 고상한 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분명한 진리가 계시된 것이다.
이방인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야곱의 우물보다 더 깊은 곳에서 얻어지는 생수의 우물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이란 아래 세상에서 연장되는 생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우물을 퍼 올려야 영혼의 갈함을 흡족케 해야 한다.
제 5장: 베데스다에서 고치심
요한복음 5장에서는 병자를 낳게 하신 표적을 보고난 청중들이 메시야에 대한 오해를 하니 그 오해를 풀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긴 강론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표적 -> 오해-> 강해) 요한복음의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데스다 못은 구원을 약속하는 상징으로 본다. 곧 요한복음 2장에 결례를 따라 담아 놓았던 물은 구원이 없는 물인데 예수님이 함께하시니 생명의 물이 되었다. 베데스다의 물도 구원을 주지 못한다. 가끔 천사를 시켜 물이 동 할 때 한 사람씩 병으로부터 낳게 하시므로 구원의 약속을 확인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베데스다의 물로는 구원을 주지 못한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했으나 이번에도(가끔 천사가 역사하는 못에 왔어도) 소망이 없음은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망이 없는 병든 자에게 베데스다보다 크신 예수님이 다가 오셨다. 그런데 성육신한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고치시는데 안식일에 대한 시비를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낮아지신 성육신인데, 그 성육신 자체에 대한 무지함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한 상태로는 38년 동안 앉아 있어도 구원이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위에서 와서 고쳤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병자의 고침이 위에서 옴으로 곧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터득해야 하는데 그것을 몰랐다. 이는 모세의 율법이 증거 했지만 그 율법의 정신을 보려하지 않음과 같다.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여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에는 빠르고 율법의 정신으로 표적을 보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해야 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신 것을 보여 주셨다. 이는 유대인의 랍비들도 인정한다. 안식일에 아이를 낳고, 늙어 죽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아멘해라) 진실로(아멘해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한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 동격으로 교훈하셨지만 성자 하나님! 곧 2위 1체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다(유대인들은 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어 왔다).
본장 19절로 22절 안에 새로운 발견이 드러났는데 조그마한 비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사회에서의 직업이 어떻게 전수되는가의 비유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소개하신 것이다. 직업의 전수의 방법은 아들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 옆에서 보고 따라 하므로 전수되고, 그 과정에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을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안식일에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다.
여기 안식일에 의미는 6일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더라. 의 상태가 안식일이다. 지금은 에덴과 같은 진정한 안식일이 없다(결핍과 소외된 것 병든 것이 있는 상태는 안식이 아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둘째 날에는 좋았더라는 말이 없는 것을 가지고 시비할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 2/3가 반란을 일으켜 소동이 나서 좋았더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6일 창조 후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제 7일에 안식하신 모습을 보면 완성되고 완벽한 창조를 즐기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 말씀 대신 사탄의 말을 들으므로 제한 속에 살고 있는 데 이것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제한성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를 포기하고 참여치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한 속에서 살아야 되고, 결핍으로 자기의 영역이 좁아진 결핍된 것을 넓히기 위하여 싸움하며 범죄 하기 시작하고 이 죄의 삯은 사망이란 품삯을 사탄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는 더 이상 하나님의 풍요로운 축복과 영생에 참여치 못하고 자기 힘으로 살게 된 것이다. 곧 자기가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버렸던 것이다. 영적 음식을 버렸고 땅의 열매도 잃어져간다(가시나무와 이마의 땀).
그러므로 안식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실 일이 생기신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일은 에덴에서 쫓기던 때부터 종말에 완성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뜻대로 살려는 충동을 버리게 하시며 말씀에 순종케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게 하는 사역이 완성될 때 하나님은 안식하신다. 이를 재창조라고도 한다. 이 안식일의 그림은 종말의 안식 사건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원한 천국이 그 실제이다.
첫 창조가 손상되었는데 그것의 회복이 재창조라고 한다면 안식을 잃어버림은 영원한 것을 잃어버림이 된다.(출애굽~제 2출애굽) 히브리 기자는 가나안이 진정한 안식이 아니고 종말의 구원의 완성과 그 때 있을 축복을 누림으로 설명한다.
제 4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의 본질적인 것은 첫 창조를 기념하고 종말의 재창조의 안식을 소망하라는 기본의 의미가 있다. 이는 인간이 자기 뜻대로 살고 싶다는 것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데 이러한 대가는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가 아니다. 적어도 하루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옮을 알고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안식일이다.
우리가 땀 흘려 일을 하여 먹고 마실 것을 얻는 이것이 곧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을 주시기 위해 오셨으므로 사탄의 통치를 끊고,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때 진정한 안식이 있으므로 예수님은 종말의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되 한국교회와 유사하게 지킨다. 문자적으로 생각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걸음도 몇 보는 되고, 몇 보는 안 되며, 버스타면 일이고, 돈 내면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엄청난 표적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안식일을 범했다. 혹은 이단이라고 하면서 메시야로서 안식일을 세우시는 표적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진정한 안식일이란?
-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다(생명을 북 돋우는 일).
- 약속으로서 생업에서 쉬는 것인데, 내 힘으로, 내 생명을 지탱하려던 것이 생업이다(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옴).
안식일은 죄악과 죽음을 몰아내고 그 일에 동역해야 한다(의사가 돈 벌이로 주일을 안 지킴은 범함이 된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안식일이 아니다. 지금은 이미 안식일이 없어졌다. 본문의 38년 병자처럼 우리 모두는 결핍 속에 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병원에는 다녀왔으나 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고통 중에 있으므로 이미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 낳아야 안식일을 지키게 된다(가난도, 근신도, 마찬가지다). 38년 병자 고치심은 안식일이라도 영적인 사역과 생명을 고치고 일으키는 일은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표적은 영생을 실현케 함을 보여준 표적이다.
예수님은 종말의 안식을 줄자로 오셨다. 그리고 심판하심은 거절했다. 38년의 병자 표적은 생명의 주요 빛 되신 예수님과 아버지를 떠나면 사망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다. 예수님께 등을 돌린다는 것은 암흑의 자식 어둠의 자식으로 스스로 빠져 가는 것이다(예수님을 떠나면 사망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은 영생을 주신다는 실제적인 말씀이며 또 미래 지향적으로 계속해서 생명운동이 일어 날 것을 교훈하신다. 물론 지금도 말씀이 선포되면 선과 악이 서로 갈라짐이 일어나겠지만 종말에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재창조의 담당자로 오셨고, 이를 표적(38년)이 증거 하고,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도 증거 한다.
제 6 장: 소경을 고치심
1. 6장 1~21절: 호수로 피신하심.
2. 6장 22~59절: 생명의 떡을 표적으로 설명하심.
3. 6장 60~71절: 설교후의 반응.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4복음서에 증거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묵시문학으로 제2의 출애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시므로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유대민족의 해방과 다윗 왕국 건설을 내다보고 왕으로 추대 하고자 했다. 이런 행위는 전혀 무리가 없는 사건이다. 당시 유대 신학에서 본 사건은 광야의 40년간 먹었던 만나로서 제 2의 출애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병이어를 종말에 오는 에덴과 같은 태초의 회복으로 보고, 태초 낙원을 회복하려는 모습으로 보았다.
유대 랍비 문서에 이런 말이 있는데,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더니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아담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고 흠 없는 무죄 상태 최고의 지식과 부족함이 없었다. 때문에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하다 라고 하고, 모세는 너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시내 산에서 네가 잃어버린 것을 찾았기 때문에 내가 너 보다 더 위대하다는 논쟁의 문서가 있다.
* 아담이 잃어버린 것
(1) 얼굴의 광채를 잃었다.
(2) 힘이 무기력해지며 키가 작아졌다.
(3) 하늘의 광채들을 잃어 버렸다(혼돈의 암흑세상).
(4) 나무 열매(에덴의 포도는 장정이 못 든다고 믿음)인 생명 나무 열매를 지킴.
(5) 땅의 열매를 잃어버림(이마의 땀).
(6) 영생을 잃어버림.
* 모세가 찾은 것
(1) 얼굴의 광채를 율법을 받을 때 찾음.
(2) 40일 금식 후 능력을 입어서 회복함.
(3)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광채.
(4) 나무열매, 땅의 열매 광야에서 만나로 얻음.
(5) 므리바 물로 영원한 생수를 앎.
(6) 복음으로 영생(율법이 아닌 장막 성전).
하지만 아담이 사단(뱀)의 꾐에 빠지듯이 아론도 하와의 위치에서 범죄 하여 다시 타락하게 되고, 모세도 율법의 돌비를 던져 깨뜨렸다. 때문에 제 2의 출애굽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메시야가 오셔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공생애 나오시기 전)이 성육신하시기 전과 후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 해서 이단들이 늘어났다. 그 표징으로 이적들을 행한다고 주장함.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제 2의 출애굽으로 해석함은 정당한 해석이지만 이 세상 안에서 누리는 축복과 해방(로마)의 출애굽으로 오해를 했다고 설명하셨다. 이적으로 만든 떡은 광야 만나 기적의 재현으로서 자신의 몸을 먹는(영접하여 믿음) 것으로 소개하셨다. 몸으로 비유된 떡을 먹는 것은 몸이 있어도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믿음을 강조함이다.
이에 반하여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학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오늘날 민중 신학도 정치적 자유!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나 이것들은 복음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 이것을 위해서 성육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표적한 바는 세상의 떡을 가져오심이 아니라 한 번만 먹으면(영접하면) 영원히 배고프지(죽지 않음) 않은 영생의 떡, 곧 하나님 편의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을 표적함이셨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떡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안에 떡은 사회정의, 정치적인 자유, 풍요로운 경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영생을 보장받지 못한다. 먹어도 또 배고프고 마시면 또 목마름이다. 야곱의 우물도 이런 것이었다. 농사할 때와 짐승을 먹일 때도 우물은 사람과 같이 있어 왔다.
그러나 또 먹어야 하고, 모세 때 광야의 만나도 구원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먹었으나 모두 죽었다. 영생이 가능치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온 절대적인 생명을 위함이요 영생을 위한 떡을 주심이요, 곧 영생의 실체를 주심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풍요롭게 배부르게 정치적인 자유를 준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그런 것을 준다면 만나에 불과하고 우물과 같다고 하셨다(그림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져오는 떡은 무엇인가? 그 실체가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은 공관복음에서 최후 만찬을 드실 때 이야기 하실 것을 여기서 보여 주셨다. 세례에 대한 해석도 여러 곳에서 해석하여 세례 신학은 있어도 세례 행하신 것은 없다(요한복음에 없음). 성찬도 여러 곳에서 설명되어 졌고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다. 왜 세례와 성찬의 신학적 의미는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그 제도는 없는가?
마가복음 14장 17절로 25절의 성찬 중에 21절을 보면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의 말씀 중 기록된 대로 간다는 것은 죽는단 말을 기분 좋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무언의 극적으로 연출하심이다. 극을 연출할 때 떡과 포도주를 재료로 삼아 생명을 가능하게 한 재료로 사용하시며 내가 내일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극적인 표현으로 먹고 마신 것이다.
그 후에 2차적으로 극중에는 재료의 몸짓이 있는데 그 몸짓으로 떡을 부스러뜨리고 빨간 포도주를 붓는 몸짓으로서 찢김과 피 흘리심의 표적을 드러내셨다. 이는 곧 엉터리 재판소에 자신을 내어 주심을 보이고 자신의 몸과 피가 우리의 음식이 되어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무언극으로 하셨어도 충분한 메시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해석까지 하심으로 의미는 4복음이 똑 같이 증언하게 함이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죽으심이 예언의 성취로 죽어 주셨다. 잔의 말씀 중에 언약의 피는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제물에 피를 뿌리면서 "언약의 피"라 하였는데, 피 뿌림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신다. 또 자기 백성들을 자녀삼고 백성이 되게 하고 임금이 되겠다고 약속한 언약의 피로 이어져 왔다. 이 피가 종말론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다. 예수님은 잔을 드시고 출애굽기 24장에 상응하는 언약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라 하셨고 누가복음 "새 언약의 피"라고 해서 마가복음보다 더 밝게 들어 내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 언약의 피의 제사다.
예레미야 31장 31절로 34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새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을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 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고,” 고린도후서 3장 2절로 3절에서 말씀하실 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하셨다.
첫 언약은 돌 판에 새겼으나 새 언약은 심장의 부드러운 곳에 세우셨다. 옛 죄는 다 용서해 버리고 심비에 새 언약을 세우심의 성취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음으로 얻는다. 그것이 다니엘 7장의 성취요 종말의 지극히 높은 백성을 창조해서 하나님의 신적인 삶을 얻게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피가 흐르게 해서 죽으시고, 살과 피를 먹는다는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로 오셨다는 확실하게 보여주심이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제 2의 출애굽이 정당하다고 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숨으셨는가? 또한 새 언약의 제사로만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하신다고 설명하셨는가? 이는 유대인의 해석이 아래 세상 해석으로 예수님이 가져올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으신다.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구원! 결핍으로 오는 죄와 죽음에서 확실하게 해방됨이 분명하다. 제 2의 출애굽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심이 분명하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유월절 양)이 틀림없다. 제 2의 모세가 틀림없다(신18:18). 예수님이 가져온 몸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의 실체의 떡임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회정의, 경제정의, 정치적 정의를 바라고 있음은 다시 그림자인 만나를 먹음과 같기 때문에 만나의 실체인 몸을 주신다(아래 세상에서 보는 제2의 출애굽).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예표 한 그림자를 절대화 하는 오류를 범했다.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심판 받는 유대 왕 인가?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나 종교적인 왕 같은 모조품이나 그림자 같은 왕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놓아 버리고 세상 왕으로 삼으려 함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문자적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왕조가 태평성대의 중요한 축복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천국의 신적인 삶의 그림자임을 알지 못하면 오해를 낳는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 같은 것 하나 더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사막을 없게 하시고 옥토를 만드시려고 오신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수질 오염이 없고, 마실 물 걱정 없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부요에 참여케 하려고 오신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의 부요만 보기 때문에 진정한 표적을 보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게 된다. 오늘날도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으로 사회정의에만 축소시킨다면 오해함이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게 되면 하늘의 축복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을 좆지 말자. 그렇다면 보수적인 교단은 잘 믿는가? 예수 믿으면 사업 잘 되고, 건강하고, 승진하고, 성공하고, 진학 잘하는 정도는 유대인의 수준에 그친다. 보수주의가 민중해방을 반대하는 것이나, 해방, 민중이 보수주의 반대하는 거나 똑 같다(한쪽은 사회혁명, 한쪽은 축복). 예수님이 본문에서 가져오는 구원은 사회혁명이나 이 땅의 풍요를 주는 것보다 하나님과 연합케 하므로 새 언약 백성으로 자녀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는 포괄적인 구원이다. 이는 어느 한 쪽에 축약 시킬 수 없지만 내포 되어 있다.(영의 병, 육의 병, 정치적 고난, 경제. 등)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이 진정한 구원이요 포괄적인 구원이다.
제 7 장: 초막절과 생수를 주심
요한복음 7장과 8장은 예수님이 계시자이고 생명을 가져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시다가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셨다. 지금까지는 표적을 행하신 후에 그 표적을 해석해 주셨지만 지금부터 7장과 8장과 9장에서는 먼저 설명하시고 난 후 표적으로 치유하신다. 이는 말씀의 권위를 명확하게 하신 것이다. 그 뒤에 10장에서 다시 강해하신 것을 볼 수 있다.
7장의 초막절에 갈릴리에 거주하신 주님이 유대인의 절기 중간에 가만히 올라 가셨다. 토론을 주고받은 25~36까지 메시야 증언에 대한 호감과 반감의 내용과 37~44은 초막절 마지막 날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며 생수의 강을 선포하신다. 레위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다.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도 노동을 하지 말지니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레23:33~36; 신16:13~15) 슥 13장은 메시야가 초막절에 교훈이다. 그 나타나실 것(그날)을 예언하셨다. 요한복음 7장도 초막절의 교훈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이신 척 하는 줄로 알고 초막절에 참석 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셨다.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니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 이러라."(요7:1) 이 때 예수님의 형제들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한 고로 비꼬는 식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나타내어 초막절에 나타날 그 메시야 행동으로 나타내라고 한다. 구약 성경 말라기에 보면 갑자기 나타나신다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요7:2~5)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 때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하시고(7:6,8)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7:9) 명절 중간쯤에 가셔서 가르치셨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 가사 가르치시니"(요7:14) 예수께서는 위대한 두개의 증언을 하셨는데 37절의 생수의 강과 8장 12절에 세상의 빛이란 두개의 위대한 천명으로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실로 암에서 물을 길러다가 제단에 뿌리는 의식을 하고 비가 내려오기를 기원했다. 이 물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
* 첫째 : 광야로 나가 초막에 지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체험하면서 광야의 만나와 므리바의 물과 연결시켜 제 2의 출애굽을 연상하면서 모세와 같은 자와 평화의 나라를 기다리며 초막절을 지켰다.
* 둘째 성령님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슥 13장의 그의 날(초막절)에 생수를 주는 언어로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한다. 이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행사의 구원인 제 2의 출애굽을 통해 구원이 온다는 의식으로 물 붓는 행사가 있는데, 이는 마지막 날 위대한 날에 메시야가 온 세상에 갈함이 생명의 물을 주시는 자(유대인이 염원하는 자)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역사가 아니고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계실 것을 말함이다. 첫 출애굽의 므리바 역사가 제 2출애굽의 성령님의 물(요2장) 그것도 외부에서 부어주는 정도가 아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살아 있는 물이요 샘물같이 나오는 것이요 생수같이 터지는 것이다.(외부에서 떠온 물은 남의 것, 내부에서 나오는 물이 생수다.) 다른 사람은 샘물을 찾아 마시지만 예수님은 전능자로 생수를 만드신 분이요 자기의 것이다. 초막절의 행사 중에 또 다른 행사는 여인들이 뜰에서 불 밝히는 행사이다.(하나님의 뜰에서 행함)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으로 보여 지고 이것이 종말에 완전히 나타나실 것인데 여기 종말은 다시 말하면 창조의 때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현상이 일어난 무죄 상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첫 출애굽의 회복이란 아담이 잃어버린 태초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종말의 하나님께서 시온에 오셔서 온 세상을 밝히시므로 어둠에 있는 백성들에게 불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태양이시요,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다. 그 때는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모이며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온 민족들에게 구원받을 길이 열린다.(믿음으로 구원이 성취) 그런데 그 때에는 초막절이 다가오면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자칭 메시아들이다. 아담이 잃은 것을 모세가 찾았지만 우상숭배로 무너져서 제 2의 출애굽을 기대한 백성들은 불 밝히는 행사를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다. 메시야는 초막절에 나타나 영광으로 시온에서 암흑을 몰아내면 온 민중들은 와서 하나님께 굴복하는 의미로 불 밝히는 행사로 한다.
빛은 계시이다. 이 빛은 생명과 관계가 있다. 빛이란 설명이 필요 없다. 눈으로 보면 즉시 앎이 발생한다. 쳐다보든지 내려 보던지 간에 앎이 직접적으로 임한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요 우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력이 없으면 눈도 장신구에 불과하여 보지 못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통하여 볼 때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가 나의 창조주요,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인 앎은 남자를 알았다. 혹은 여자를 알았다 하면 부부라야 아는 것이다. 곧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서로의 연합을 말하는데 이성을 알려면 같이 잠을 자야만 안다는 앎이 발생함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모든 생명을 주는 분과 접붙이는 분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계시로 앎이 발생했고, 또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성자)을 알게 된다(빛).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흐림에 의해서 생명을 주는 분으로서의 빛 이시요, 둘째는 계시자로서의 앎에 빛이시다.
* 첫째 : 생명창조와 그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
* 둘째 :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초막절의 행사가 염원했던(광야에 나가 고생하며 지킴) 것을 완성 시킬 제 2의 출애굽의 완성자요, 유월절을 지킬 때 잔치하며 염원했던 것을 완성하실 메시야가 오셔서 계시해 주셨지만(초막절: 물, 빛. 유월절: 어린양)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계시를 이 세상의 가치 판단으로 이해하며 오해함으로서 해마다 나타난 거짓 메시야와 같은 자로 여기고 온 민족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했다.
제 2출애굽을 기다리는 것은 아주 깊은 신학적인 깨달음 이었으나 해석상으로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는 메시야를 기다렸다. 즉 오천 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먹이시면서 생명을 가져다주신 분을 계시했지만 유대인은 오해를 일으켰고 이때 예수님이 제 2출애굽을 상기 시키면서 광야의 만나를 들고 나오셔서 만나는 좋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진정한 구원을 주지 못한다(10년 생명 연장). 즉 죽음이라는 그 자체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삶의 자체가 유한되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삶 덩어리를 송두리째 가져다주시는 분이신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지 못 했다 오늘날도 기복신앙으로 빠지게 되면 영생 주시는 예수님을 만남 보다, 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남이 좋게 된다. 이는 세상 것만 보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주셨지만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선생들이 핍박하고 거부했다. 그 이유는 메시야는 갑자기 나타나야 하는데 봐라! 우리는 예수가 누군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마리아와 그 형제 그리고 고향을(태어난 곳도) 알고, 목수의 집인 것까지 안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이 말하는 것을 다 성취하신 것이다. 베들레헴 탄생이 갑자기 오신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란 아래 세상에서 오는 것의 갑자기가 아니다. 위에서 오심을 나타내어 갑자기라 했다. 유대인들은 위에서 나심을 알지 못했고 로고스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는 분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시하시지만 여전히 감추어진 상황이다.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에 말씀하시기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성경대로 응함이다.
제 8장: 가치관의 구분
요한복음 7:53~8:11까지는 사본 상 불안한 부분이다. 어떤 사본은 요한복음 맨 끝 부분에 붙여 놓고 또 어떤 사본들은 누가복음에 붙여 두었다. 확실한 것은 이 맥에 속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로서는 합당하고 초대교회로부터 전승되어 왔다. 어떤 신학자들은 떠돌이 전승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8장 12절로 넘어가서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 8장 12절로 20절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 하시므로 유대인에게는 오해가 발생되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율법을 가지고 나와서 율법에는 두 세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혼자이며 증거도 스스로 증거 했기 때문에 참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사실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동시에 증거 한다고 하시고 위에서 왔다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말하고, 내어 주심은 계시자인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율법으로도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육신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께로 인도하는 율법 책을 믿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율법 책으로 정죄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8장 21절로 29절까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계시한다. 이해하지 못한 자들에게 아래 세상 적으로 생각해서 계시된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고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은 영생의 물 공급자로(므리바 물의 공급) 종말의 성령님의 물로 자기 계시하시고 두 번째로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의 위대한 천명을 함으로서 불 밝히는 행사로 계시하셨음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셋째로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로 계시하신다.
요한복음 8장 28절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로 알리라." 하셨는데 이는 곧 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4절 하 반절에서도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하셨다. 여기서도 내가 하나님임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을 공급해 주고 생명의 물을 공급해주는 분이시요, 빛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름도 본질의 표현인데 예수님은 당신의 본질(위에서 오신 하나님)을 말씀으로 드러내신다.
그리고 다니엘서에 나타난 한 사람의 아들을 공관복음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로 예고되고 들림 받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서 물리적으로 올림의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그 수준에서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나님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영광 받고 높임 받은 자가 된다. 죽음이 왜 영광 받는 것인가?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계시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시다. 높이 들려서 영광을 받고, 높임을 받으실 때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물리적으로 십자가에 들려서 죽으실 때 신적인 본질이 나타나서 믿음의 주로 드러내신 것이다.
* 십자가: 패배, 저주, 고난을 받음, 낮아짐
* 부활: 하나님이 높여주심, 본질을 보여 주신 분으로 곧
높아지신 분이시다.
이렇게 두 가지가(낮아짐, 높아짐) 어우러져서 하나의 복음이다. 서로가 다른 것 같지만 일치된다. 서로 분리되어 나온 것은 공관복음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동시에 올라가는 것을 강조했다. 어떤 학자는 부활은 몸의 맹장과 같이 표현했다(에반스). 이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 사건이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냄의 사건이다(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 복음으로 구원받는 계시의 절정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확증이 된다. 이 확증은 곧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보냄의 형식과 내어줌의 형식으로 낮아짐의 절정과 수난의 절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심을(요3:16) 계시한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은 예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마치 물고기를 놓고 사람을 소개함 같이 계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이며, 원숭이를 보고도 사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동물학적으로 99.9%가 같을지라도 0,1% 때문에 계시가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완전히 하나님이셔야 하나님임을 계시할 수 있다.
성경적인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이름은 본질의 표현인데, 임마누엘로 나타나셨고, 어두웠던 이 땅에 빛으로 계시되어 나타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거짓 메시아로 알았고 혹시는 떠돌이 하나를 잡아다가 죽이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분으로 알았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이시요 계시의 완성자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요, 하나님을 계시하므로 예수님 자신도 계시함이며, 또한 자기를 들어내면서 하나님을 드러내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말씀하시지만 자기의 말씀을 하시고 자기 말씀을 하시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하신 것을 분명하게 밝히시므로 아버지와 예수님이 한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 몇 개의 보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세상의 빛이다.
(2) 나는 위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다.
(3) 나는 선한 목자다.
(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양이다.
(5) 양의 문이다.
(6) 포도나무 이다.
(7) 그 사람의 아들이다(단7장).
(8) 나는 생수의 강이다.
(9) 너와 같은(모세) 선지자이다(신18:18).
위의 말과 표적들을 보여 줘도 믿지 못한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민수기 21장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이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들리심은 낮아짐의 극치인 동시에 높아짐의 절정인 것이다. 그 절정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으로 확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버지와 분리인 동시에 연합이다. 내려오심의 절정인 동시에 귀환이셨다.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께 대항하여 요한복음 8장 13절에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내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여기에 대하여 8장 14절로 18절에서 긴 설명을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 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 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다는 것은 말씀으로 본질을 드러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8장 19절로 8장 22절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 하시므로 본질(하나님)을 정확히 드러내신다. 그런데 그 본질을 드러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요한복음 8장 49절에서 예수님을 무시하고 말았다.
요한복음 8장 30절로 59절을 읽어보자. 예수님은 자유를 말씀하시고 아버지와 너희 아비 그리고 아브라함 보다 먼저 계심을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고로 종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요 8:33) 아브라함이 아버지라(요 8:39)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자손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고 약속을 성취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해 버린다(18:9). 이것은 쓸데없는 자신감으로 자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을 믿었다(소수). 그리고 예수님은 심판을 하셔도 바른 것이지만 심판하지 않으셨고, 스스로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빛이 왔으나 보지 못함이 곧 심판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윗 세상의 빛으로 하셨고, 유대인은 아래 세상인 어둠으로 말하니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의 어두운 말로 대화하시면 거짓말쟁이가 된다고 하시면서 진실로 말씀하신 것을 본다(8:5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을 위의 세상(하늘)에 속하지 않고 아래 세상의 어둠에 속함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심판을 안 하셔도 자기들 스스로가 심판을 받는 것이다.
미술품 전시회에 가서 이것도 그림이냐? 고 한다면 그 자체로 미술의 무식함을 드러냄과 같다.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의 자만에 빠져 빛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여 심판을 불러 오게 된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지만 스스로 심판을 받아 갈라지게 된다. 미술 전시품을 모르면 가만히 지나가면 중이라고 간다. 뭐라고 평을 하면 곧 무식하다는 심판을 받는다(말꼬리에 물감 묻혀 뒤흔든 것 같아도 작품인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언제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소수와 돌아가는 다수의 분리현상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약속대로 오셨지만, 거부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이 없음을 지적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 마귀의 자녀가 된 것이다.(안약 거부는 마귀 자녀다.) 음행의 자녀가 아니고 종이 되지 않으면 다 된 줄 알고 아브라함 껍데기만 붙잡고 있으니 예수님 눈에 그들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이는 모세 율법을 정확히 알지 못함이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심은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율법을 외곡 시키려는 사탄의 사주를 받고, 육신이 약해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입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하지만 행동은 아브라함을 떠났기 때문에 아들이 되라는 예수님을 떠나고 분리 현상이 난다.
요한복음 8장 23절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영원한 하나님으로 아브라함과 언약했던 약속을 성취하시러 오신 예언의 성취자이시다. 이 예수님을 아브라함은 뵙기를 기다리며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56)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이 기뻐한 사실이(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너희 앞에서 현실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네 나이 오십도 못 되었는데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반문하나 말도 안 되는 질문에도 인자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분명한 진리를 밝게 들어내셨다. 이때에 모든 청중이 얼씨구 좋다하고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돼야 할 것인데, 저들의 반응은 완전히 미쳤다고 하며 죽여도 아깝지 않은 자, 이단자, 하나님 노릇 하는 자로 여겨 돌을 들어 치려고 했다. 이렇게 기막힌 현실 앞에서 인자하신 예수님이시라 지옥으로 그들을 끌어가시지 않고 숨어 버리신 것을 볼 수 있다(요 8:5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