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로 대참변을 겪은 당시 오오카와 초등학교의 실상!
그날 오오카와 초등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중에 교사들은 권력투쟁
인용출처 : http://thutmose.blog.jp/archives/66862393.html
빨간 차가 이시노마키시 홍보차로 키타카미강의 건너편 강가에서도 한대가 오오카와 초등학교를 향해 피난할것을 몇번이나 호소했지만 거부되었다고 한다
40분간의 말다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에 발생한 해일로 이시노마키시 오오카와 초등학교 학생과 교원들 84명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아동의 학부모들이 제기한 재판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2016년 10월 26일 센다이 지방법원은 학부모들의 소송을 인정하고 시와 현에 약 14억엔의 손해 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왜 쓰나미라는 자연 재해가 재판에서 다투어지고,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을까요.
당초에는 자연 재해가 (교사와 아이들의 행방불명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상세한 사항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교사들이 싸움을 벌여 쓰나미로부터 피난을 금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진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발생하여 건물의 유리창이 깨지거나 비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졌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이날 교장은 출장때문에 부재중이어서 책임자가 없었던 관계로, 지휘 명령 계통을 둘러싸고 교사들간에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지진이 발생한지 3분후인 2시 49분에 쓰나미 경보가 나왔고, 소방 및 동사무소의 홍보 차 몇대가 출동하여 스피커에서 높은 곳으로 피난할것을 호소했습니다.
홍보 차량을 운전한 사람은 적어도 2번, 오오카와 초등학교 앞까지 가서 피난할것을 호소하였고, 두번째엔 차에서 내려 교사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교사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앉힌 채 오오카와 초등학교 교원 11명은 2파로 분열해, 피난 파와 대기 파가 나눠져 끝없는 논쟁을 반복했습니다.
오오카와 초등학교 100m 정도 뒤에는 뒷산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언덕이 있었고 거기에 올라가 피난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교사의 한 사람으로 "자치회"또는 보호자 중 한 사람이 "산에 오르다 학생들이 넘어져 부상을 당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라고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책임론을 전개했습니다.
이 때 현장에 있던 교감은 처음 뒷산에 피난하는 것을 동의하고 있었다고합니다만, 강경파를 설득하지 못하고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쓰나미를 향해 행진시킨 것은 누구인가?
강경파 교사는 "쓰나미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쓰나미가 오지않고 뒷산에 오르다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면 교감에게 책임을 묻게된다"며 교감을 위협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또한 강경파의 교사들은 피난을 위해 달려온 스쿨 버스에 학생들이 승차하는 것도 금지하였고, 버스 운전사는 마지막까지 버스 안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다가 학교 앞에서 쓰나미에 삼켜졌다고 합니다.
버스에 승차하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모두가 버스를 탈 수 없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라든지, 여러 번 왕복하면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몇 아이는 피난을 호소하는 마을 방송이 들려 왔고, 홍보차량이 고함치고 있는 것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몇 명의 학생이 뒷산으로 달아나 일단 대피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 교사들은 산까지 아이들을 쫓아와 끌어 내렸고 전원을 교정에 모아 호통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여기에 있으면 모두 죽을거야! 왜 선생님은 모르는거야"라고 흐느껴 울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울면서 떨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동안 학부모 몇명이 자가용으로 마중왔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학교를 나온 학생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이웃들은 모두 뒷산에 올라가 살았지만, 학생들을 뒷산에 오르도록 제안해도 모조리 교사에 의해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피난을 호소하고 있던 홍보 차량의 운전자는 숲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바다 쪽에서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홍보 차량은 오오카와 초등학교쪽으로 돌아가, 쓰나미가 제방을 넘은 것을 전했지만, 그로부터 아직 5분간 교사들은 대피할 것인지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발생한지 대략 40분 후인 3시 25 분이 지나서 이웃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이끌고 카미가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을 목격하였고, 직후에 굉음과 함께 강이 붕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조차도 행진의 가장 후미에 있던 교사와 학생 몇 명은 뒷산에 올라가 살았고, 운동장에 남아있던 상태라면 해일을 보고나서도 뒷산에 올라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교정과 뒷산은 아이도 몇 분 안에 오를 정도로 가까왔고, 과외수업 등으로 아이들이 자주 올라가곤 했습니다.
왜 교사들이 2파로 분열하여 교정에서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는지, 교장 부재 속에서 교감 파와 반 교감파가 파벌투쟁을 하고 있었던 의심이 강합니다.
아마 반대파의 교사에게 피난는 구실에 불과하였고, (단지) 교감을 비판하고 타격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쓰나미가 오고 있는 것을 들은 후에 학생들을 저지대인 카미가와를 향해 걷게한 것은 인재(人災)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장 후미에서 걷고 있어서 혼자만 살아남은 교사는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학부모와 이웃과 살아남은 학생들의 증언 밖에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부소견
2011년 3월 11일 토호쿠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곧바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해 동북해안을 강타하였습니다. 이 쓰나미로 수만명의 주민들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위 오오카와 초등학교도 당시 발생했던 쓰나미의 피해를 입어 교사 10명과 학생 74명(당시 오오카와 초등학교의 재학생 수는 108명)이 쓰나미에 휩쓸려 지금까지 행방불명된 상태로 있습니다.
사고 초기에는, 이 사고가 쓰나미에 의한 단순한 비극으로 생각했지만 그당시 오오카와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사고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에따라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학부모들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법원은 학부모들에게 시와 현이 14억엔의 손해배상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이 나오기까지 무려 5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만큼 그당시 상황들을 정확히 알아내는데 애로가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오오카와의 교사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교사가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그당시 대략적인 상황들이 드러났고 이런 큰 비극의 원인은 교사들의 파벌싸움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교감파와 반교감파가 피난을 두고서 서로 대립하며 언쟁을 벌이는 가운데 피난의 골든타임을 놓쳐 버렸고 막판에 가서는 저지대인 카미가와쪽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는 결정적 실수를 하였습니다!
위 오오카와 초등학교의 사례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을수 있는지 견본이 아닐까 생각될정도로 84명의 귀중한 목숨들이 너무나 어이없게 스러졌습니다.
위 사례를 보고 무릇 교사가 되려면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경주지진당시 밖으로 대피하려는 학생들을 윽박질러 교실에 주저앉힌 교사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오오카와 초등학교의 교사들과 판박이가 따로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떨면서 울고 있는데 위정자들은 이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권력투쟁에만 몰입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상황이 3.11 쓰나미가 덮친 오오카와 초등학교와 닮아 있습니다. 지리멸렬한 논쟁을 걷어치우고 단호히 학생들을 뒷산으로 인도할수있는 교사가 나와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25&articleId=1252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