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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밥상이 올무가 되다, 경건한 행위가 도리어 구원을 가로막는다(롬 11:1-10)

삭개오2 2016. 10. 2. 08:47

1. 오늘의 말씀 : 11:1-10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인간의 시간 크로노스 안에서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죄의 세력이 현존하고 환난이 에워싸는 크로노스 안에서 내가 영원을 앙모하나이다.

고단한 몸과 피곤한 영혼이오나, 내 몸을 쳐 복종시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불안과 탐심으로 점철된 이전의 삶이 어수선한 꿈이 되어 나를 혼잡케 하나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보혈로 씻어 정결한 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당신의 은혜이오니,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더 많이 수고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오니, 다만 복음을 들은 이들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도 내 영혼이 편히 쉴 곳, 아들을 힘입어 들어가는 아버지 집이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로마서 9-11장은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의 구원을 논증하고 있다.

9장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였다.

10장은 이미 선포된 복음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위에 손을 벌리시고, 그들을 찾으신다.

 

11장은 바울에게 계시된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의 신비를 증거한다.

1-10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전체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11-24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도리어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25-36절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계시하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묻노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미리 선택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에 대하여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탄식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으며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그런데 그들이 내 목숨도 찾고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또한 현재 순간에도 은혜로 선택함을 받은 남은 자가 있다.

만일 (이것이) 은혜로 된 것이라면, 따라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그가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선택받은 자가 그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늘날까지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윗은 말하였다.

그들의 제단(밥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함정과 보응의 계기가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둡게 되어 그들이 보지 못하고 영원히 그들의 등을 굽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손을 벌리고 계신다.

이들은 믿음의 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를 따라 구원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 중에도 은혜로 택함을 받은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셨다!

 

무엇보다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증된다.

그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디아스포라)이지만 모국어(히브리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또한 랍비전승에서에 따르면 베냐민 지파가 홍해를 가장 먼저 들어갔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재통일하려는 희망이 이 지파와 결부되었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지파에 속하였으며, 바울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는 자로 자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 구원에 이르고자 열심을 내었고, 이 일에 조상들보다 더욱 열심을 내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14).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6).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 흠이 없었던 그는 실상 자기 의를 세워 하나님의 의를 거역한 완악한 자이었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실존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였고, 그런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고 고백한다.

나아가 그가 긍휼을 입은 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딤전 1:16).

 

그런데 버림받지 않은 이스라엘은 구약의 엘리야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확증된다.

바울은 자기가 버림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족 이스라엘도 버림받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논증하였다.

여기서 엘리야의 이야기를 예로 든 것은, 바울 자신의 상황에 근거한다.

그의 상황은 홀로 남은 엘리야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주어진 약속, “내가 나를 위하여 바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는 말씀에서 위로를 발견하였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엘리야의 탄식은 왕상 19:10, 칠천 명의 남은 자가 있다는 하나님의 응답은 왕상 19:18절에서 인용하였다.

 

엘리야가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탄식하듯, 바울 또한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탄식하였다(9:30-10:3).

엘리야와 바울 자신을 비교하는 유형론은 엘리야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시된 바, 바울의 상황이 구원사건 속에 편입된다.

왜냐하면 엘리야에게 약속된 칠천 명이 은혜로 구원받듯이, 바울 또한 은혜로 택함 받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 순간에도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다(5).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도리어 율법의 행위가 없이 은혜로 택함 받은 이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이들은 구원에서 배제된 남은 자들이 되어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다(7).

여기서 완악하게 되다’(, 포로우)불구가 되다’(, 페로우스세이)와 관련되어 있다.

화석처럼 굳어진 마음은 불구가 되는 것에 비유되어, 스스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진술하는 이 말씀은 신명기와 이사야 말씀에서 자유롭게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29:10).

 

완고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는 다시 다윗의 증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의 밥상(제단)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함정과 보응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이 어둡게 되어 그들이 보지 못하고 영원히 그들의 등이 굽게 되었다.

이 말씀은 시편 69:23-24절에서 인용되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그들의 밥상은, 유대교의 경건을 대표하는 제의를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제의가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며, 그의 등을 그가 피할 수 없는 질곡 아래에 매어 놓고 말았다.

이스라엘에게는 파렴치한 죄악들이 아니라, 도리어 경건한 일이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의 경건은 그들의 등을 항상 굽게 만들며, 구원에 대하여 무력하게 만든다.

 

죄의 세력은 언제나 경건한 행위의 정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활동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여 믿음의 의를 거부하면, 종교의 절정에서 가장 활발히 역사하는 죄의 세력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존은, 그것이 자기 경건을 드러낼 때 죄의 세력에 의해 깊숙이 휘말린다.

경건한 자에게 역사하는 죄의 세력은 기만적이며 내적인 환난과 곤고를 불러오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7:11).

 

하지만 경건한 자는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자기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의 인격이나 행동을 봄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아니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자기의 경건에 머문다는 것은 구원받아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기 못한다.

그것은 자신이 불경건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오직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에 대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진리대로 심판하심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3).

 

경건한 자에 대한 구원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심판하시는 은혜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심판의 말씀은 더 이상 자기에게는 어떤 희망도 가지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며, 그에게 비로소 희망이 있다.

은혜로 택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떠한 방도도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중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현실이다. 그리고 바울의 실존이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4-15).

 

 

4. 나의 묵상

나는 철저한 행위중독자이었다.

나 스스로 힘으로 경건한 삶, 경건한 신앙생활을 이루고자 하였다.

경건의 정상에서 죄의 세력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죄의 세력은 선한 일, 경건한 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나를 사망으로 던져버렸다.

하나님께 대해 가장 열심 있는 자를 자처하였으나 죄의 세력에 사정없이 휘말리는 자이었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나를 심판하셨다.

말씀의 빛 아래에서 보니, 나야말로 죄인중의 괴수이었다.

경건한 행위를 빙자하여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참으로 교회의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심판의 자리에서 나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 것도 아닌 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 아무 것도 모르는 자, 그가 바로 나이었다.

그런데 모든 희망을 접고 죽기를 구하던 내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날마다 생명의 삶을 살게 하셨다.

 

하지만 죄의 세력은 여전히 혼미한 영으로 역사하여 나를 속인다.

죄의 세력으로 역사하는 사망은 주의 재림때에 최후로 멸망 받는다(고전 15:26).

그래서 가장 복된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강력하게 역사한다.

나의 행위를 드러내게 하며 내가 무엇이나 한 듯이 나를 속여 사망으로 던져버린다.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십자가에 나를 못 박지 아니하면 죄의 세력의 제물이 되고 만다.

 

어젯밤 울산 인터콥 BTJ 헌신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성경에서 증거하는 복음을 듣고 영으로 알기를 사모하였다.

내일부터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복음생명캠프가 열린다.

생명의 역사, 그 지경을 넓혀가는 일에 어찌 죄의 세력이 관망하겠는가?

참석하려는 이들에게, 또 참석자들을 혼미한 영으로 속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목도하며 하나님 외에 소망이 없는 자임을 각성할 때 죄의 세력을 무력해지고 혼미한 영 대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역사할 것이다.

 

먼저는 내게서 혼미한 영을 거두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 소망도 없는 자, 나의 적나라한 실체를 목도하며 주의 긍휼을 구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복음을 듣고자 나오는 이들을 위하여 진리의 영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오랫동안 경건한 행위를 주장하고 자랑하던 자이었습니다.

경건한 행위를 통해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을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혼미한 영이 역사하였고, 시기와 분냄, 분쟁과 다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듯, 경건한 행위가 내게 올무와 덫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부터 불경건한 자이었으나 행위로 경건하게 되고자 한 자, 심판을 피할 수 없었나이다.

 

, 아버지...

진리대로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의 빛 아래에서 비로소 죄의 세력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내게서 나온 경건한 행위는 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기 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니 죽기만을 구하였습니다.

모든 희망이 소멸된 심판의 자리, 그런데 거기에서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진실로 주의 심판은 구원에 이르는 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죄의 세력으로 역사하는 사망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최후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행하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속이나이다.

가장 귀하고 복된 일,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나를 속입니다.

, 주여! 나를 혼미한 영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이오니, 더 많이 수고했어도 내가 한 것이 아니옵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는 자 되어 내 안에 주께서만 사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말씀묵상선교회
글쓴이 : 굿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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