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그 ‘사랑’이, 예를 들어,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 성품에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성경에 나타나듯이, 신의 성품에 참여해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벧후 1:4; 갈 5:22 – 23).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는 삶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도 ‘사랑’으로 요약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의 신앙생활도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만큼 신앙에서 ‘사랑’은 심각하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누가 아무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더라도 그의 삶에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래에 인용된 구절들에 나타나듯,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1 – 46)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의하면 주위에 헐벗거나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병들거나 나그네 되거나 병든 사람이 있는데도 그 사람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 최후의 심판에서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한마디로, 삶에 ‘사랑’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즉, 무정한 사람이—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에서 ‘사랑’은 심각하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사랑’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막상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엄청난 성경지식이 있는데도 무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나타나듯,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사랑’은 신앙에서 심각하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사도 바울의 경고처럼, 다 헛됩니다(고전 13장)—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엄청난 성경지식이 있는데도 무정한 사람이 영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루는 한 성도가 제게 영분별을 의뢰했습니다. 그 성도는, 한미디로, ‘기도의 종’이라고 일컫을 정도로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성도를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들만 그 성도가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자신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참 겸손합니다. 그리고 그 성도가 그렇게 겸손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만큼 영성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때는 바로 눈치를 챕니다. 제 경우, 그 성도에게 잘못된 계시를 전했다가 그 계시가 미혹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습니다—그 성도가 그 계시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기도하며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그 성도의 말대로 그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그 성도가 영성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왠일로 그 성도가 제게 영분별을 의뢰했습니다—구체적으로는,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경험한 현상에 대해 영분별을 의뢰했습니다. 그 예배가, 다른 예배들처럼, 찬양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참 은혜로왔다고 합니다. 그 후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 중 나타난 그 목사의 성경지식이 신구약을 훤하게 꿰뚫어 볼 정도로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영적으로는 너무나도 좋지 않은 기운이 설교시간 내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설교가 저렇게 성경적인데도 영적으로 좋지 않은 기운이 설교시간 내내 감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면서 자신의 ‘영분별’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겠다 싶어서 제게 영분별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 성도가 사는 곳 근처에서 신구약을 훤하게 꿰뚫어 볼 정도로 성경지식이 엄청난 목사는, 제가 알기로는, _________ 목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에게 “그 때 _________ 목사가 설교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성도가 깜짝 놀라며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참 무정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 성도는 그 목사가 무정한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 성도에게 그 목사로부터 느낀 것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의 대답이 놀랍습니다—첫마디가, 그 목사에게 차가운 기운이—무정함이—느껴지더랍니다. 그 대답을 듣고 참 안타까왔습니다—그 목사가 얼마나 무정했으면, 그 성도가 그 목사를 처음 대면했는데도 무정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 은 신앙에서 심각하고 중요한 가치이고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즉, 무정하면—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예수님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가, 바리새인들처럼, 엄청난 성경지식이 있는데도 무정하다보니 그 목사의 설교 시간에 엄청난 성경지식에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좋지 않은 기운이 그 시간 내내 감돌았던 것입니다—그만큼 그 목사가 영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성경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도 바울의 경고처럼, 다 헛됩니다(고전 13장)—위험합니다.
그러므로
본질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지식도 중요합니다만 ‘사랑’한다는 전제하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에 충실하셔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Daum Café, ‘Dean’s Study (딘스 스터디)’ http://cafe.daum.net/deanjestory/9B08/2019
☞ Daum Cafe, “이 시대를 향한 외침” (http://cafe.daum.net/bangju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