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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매튜 미드 (Matthew Mead, 1629-1699)

삭개오2 2016. 7. 24. 04:34

매튜 미드 (Matthew Mead, 1629-1699)

 

 


 

매튜 미드 목사는 1629년 영국 남부의 버킹엄시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출생과 교육 등의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킹엄시의 부릭힐(Great Brickhill)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과 1658년 1월 22일에 쉐드웰(Shadwell)의 뉴채플(New Chapel) 교회의 목사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부목으로 있던 1660년 「영적 지혜」(Spiritual Wisdom improved)라는 설교집을 출간하였습니다.

 

1622년 기도 방식 통일 법령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는 다른 성직자 2천여 명과 함께 성직에서 추방당하고 1년치 생활비를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매튜 미드 목사는 헨리 버튼(Henry Burton)이 1644년에 설립한 비국교도 교회인 스탭니의 우스트 하우스(Worcester House)에서 존 오웬, 카릴, 그리피스 등 청교도 거목들의 참석 하에 위임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1671년의 일입니다. 스탭니에서 설교했던 매튜 미드에 대해 역사가 켈러미(Calamy)는 많은 회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를 열망했고 캘러미 자신도 미드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증언합니다. 캘러미에 따르면 미드는 매우 사려깊은 사람이었고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합니다. 캘러미의 증언에 따르면 미드는 하나님의 괴롭게 하시는 손길 아래서도 하나님의 자비에 경탄하며 말하기를, '지옥의 이쪽에 있는 모든 것은 자비이며, 내가 받은 자비는 내가 진 짐보다 더욱 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튜 미드는 1684년 9월, 국왕을 암살하려는 사건, 즉 라이 하우스 모의(Rye House Plot)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오웬과 그리피스 목사와 함께 기소됩니다. 이 사건은 증인 카스타레즈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얻어낸 증언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미드는 추밀원의 심문에 의연한 자세로 그의 무관함을 증언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 왕이 친히 그를 즉시 석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매튜 미드는 연륜이 더해 가면서 복음적 열정과 영혼에 대한 사랑도 더해 갔습니다. 그는 불필요하고 무익한 논쟁을 싫어했고, 복음의 본질적 교리를 깊이 연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미드는 1699년 10월 16일 향년 70세로 소천되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동요의 기색이 없었고, 친구가 심경을 묻자, "집으로 돌아갈 넋이지... 사명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라고 담담히 말한 후,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친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매튜 미드 목사는 스탭니 교회의 남서문 근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사역자

고(故) 매튜 미드 목사의 시신을 안장하다.

버킹험셔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경건과 학식과 웅변에 탁월한 분,

불굴의 열정을 가지고

조국과 신앙과 자유를 위해서

끈기있고 탁월한 노고를 완수하다.

평생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하기를 갈망하더니

1699년 10월 16일 향년 70세의 일기로

오랫동안 소망하던 천국에 행복한 심령으로 들어가다.

후손들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와 지극히 자상한 남편과

훌륭한 아버지의 진정한 기독교 목사의

빛나는 본보기를 남기고....

출처 : 이 시대를 향한 외침
글쓴이 : 삭개오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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