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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꿈과 환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 어떻게 다를까?

삭개오2 2016. 6. 11. 19:36

꿈과 환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 어떻게 다를까?

 

 

오늘 나눌 내용은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12:1. 개역개정)

 

모세가 (이방지역의)구스 여인을 취한 사건이다.

모세를 비방하는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 야훼 하나님께서 직접 변론하신 내용을 들어보자.

 

민수기 12(개역개정)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미리암과 아론이 너처럼 우리도 야훼 하나님과 이야기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곧 모세와 야훼 하나님과의 (친밀함의)관계를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들도 우리도 그 정도는 친밀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의 정확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6.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8.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미리암과 아론에게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은밀한 말(or 비유)

대화를 하였는데,

 

모세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서

대화를 했다.

 

 

이 사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 보자.

한 부자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던 도중 실수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노인 한 분을 차로 치는 사고가 났다.

 

법대로 처리.

탑승자는 자신의 모든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사건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탑승자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변호사를 보내어 자신의 변호사가 직접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가해자

부자

변호사

피해자

(와 가족들)

 

가해자는 법이 정해 놓은 규정을 따라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다. 절대로 법을 어기면서까지 일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직 법대로만 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와 그 가족들)는 변호사와만 대화를 나눠야 한다. 가해자인 부자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체. 그러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분을 낸다.

 

사람으로서의 도의적인 태도.

어떻게 사람이 되어가지고, 자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느냐?”

찾아와서 잘못했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법대로 돈만 주면 다 된 것이냐?”

 

변호사는 말할 것이다.

저희는 법대로 했을 뿐입니다.”

“(법에 의하면)도의적인 책임까지는 질 필요가 없습니다.”

 

법과 도의적인 태도

가해자가 피해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체, 모든 수순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정한 규정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가해자가 반드시 피해자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도의적인 책임을 따를 경우에만 가능하다.

 

갑자기, 성경의 이야기를 하다가 (비록 주변의 실제적인 이야기이지만)사건 사고의 이야기로 빠져 들어서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줄 안다.

이제 정리를 해 보자.

 

주변의 사례에서는 법과 도의라는 단어를 가지고서 만나지 않아도 되는 관계 vs 만나야만 하는 관계를 설명했다.

 

i  법을 따르는 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대화는 변호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i  도의를 따르는 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대화는 직접적으로 만나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 속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음과 같다.

 

야훼 하나님과 우리 자신간의 만남에 대해서

율법을 중시하는 이는

율법에 제시된 내용을 통해서만주님의 (생각과 마음인)뜻을 알면 된다고 여긴다.

 

율법적 형식을 중시하는 이는

규칙적으로 정해진 예배 형식 안에서만 주님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중시하는 이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설교 내용 자체가 주님의 뜻을 듣는 것이라 생각한다.

은사자의 예언이나 그의 상담을 통해서만 주님의 뜻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친밀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려 해도 안 된다.

 

부부간의 친밀함을 논하려 한다면,

그 사이에 법을 끼워 넣는 게 더 친밀할까?

그 사이에 목회자가 자리를 함께 하는 게 아름다운가?

둘 사이에 (속내를)감추는 은밀한 말, 곧 비유로 이야기 하면 즐거울까?

 

부부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두어선 안 된다.

남편이 대통령인 것과, 남편이 병석에 아파서 있는 것.

친밀함이 돈독한 부부라면 어떤 사회적 지위도 아내에겐 친밀함을 더하지 못한다.

 

▶ 목회자 분들(과의 상담)을 통해서

 목회자 분들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책에 쓰여진 내용을 통해서

 예배 형식을 통해서

 교회(공동체)라는 특정한 건물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어찌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처럼 여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단계에서 멈춰 선다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에 있으니……

그 단계에서 멈추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성장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때 유아의 모습, 반드시 중요하다.

유아의 모습이 필요 없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유아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찌 생각되는가?

그게 정상일까?

그런 모습을 보면 그 부모가 기뻐할까?

 

신앙은 성장을 해야만 한다.

반드시……

매일 매일 어제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가져야만 한다.

어제까지 165㎝의 키였다면, 오늘은 166㎝의 키로 자라야 한다. 어제의 그 몸을 오늘은 버려야 한다이것이 성장이다.

 

성장이 멈춰가면 그때부터는 죽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내가 살아 왔던 것보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이것이 인생 속에 그려져 있는 모습 그대로이지 않는가?

 

모두가 자녀다.



첫째는 20, 둘째는 10, 막내는 5살이다.

부모의 눈에 막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그런데 5살 된 막내와 집안의 중대한 사실을 논할 그런 부모가 있을까?

야훼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부모는 5살 배기 막내를 참으로 사랑한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5살짜리 어린 아이와 집안의 중대사를 논하는 부모는 없다.

집안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을 만큼

장성한 자로 성장한 자녀

와만 집안일을 논한다. 부모가 자신의 속내를 감추면서?

 

Absolutely Not!!!!!

절대로 아니다.

어찌 부모가 자신의 첫째 아들과 속내를 감추고서 이야기 하겠는가?

하지만 5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부모 있을까?

 

5살짜리 아이에게

아들아. 우리 집안에 큰 재정의 어려움이 생겼단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밥을 적게 먹거나 혹은 굶어야 한다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니?”

 

이처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필자만의 생각일지는 몰라도

우리 아기. 엄마랑 아빠, 그리고 형아가 우리 집을 좋게 할거야

우리 아기 배고파? 배고프지 않게 많이 묵어~”

밖에 나가서 즐겁게 놀다 와.”

 

어린 나이의 자녀에게는

너희가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려운 형편을 이겨내는 방법이다고 생각하는게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장성한 자녀에게는

부모의 고충에 너도 함께 동참해 주길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을까?

 

 

여러분.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자녀 된 대접을 받을까요?

아닙니다.

성장 상태에 따라서 부모는 (나쁜 의도가 아닌 뜻에서)차등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부모 된 여러분 자신도 자녀에게 그와 같이 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성경은 학교에서 나눠주는 교과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고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고서를 주셨죠. 바로 저와 여러분이 매일 같인 누리며 사는 주변과 일상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향해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고 섬겨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자연스레 성경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

참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곳, 우리의 믿음에서 능히 할 수 있는 분량(의 천국)을 주시기 때문이죠.

천국. 등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등급은 스스로가 만들어 갈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 자신이 애써서 성장하고자 하는 그 만큼을 천국의 크기(??)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죠.

 

자라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영적 상태에 머물러야겠다는 안주의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어제의 모습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새로운 몸을 입어야만 합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피조물로 덧입힘을 입어야만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외국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약간 공상과학 영화치고는 너무나 파격적이었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죠. 어린 제가 보기에.

등장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마치 사람 안의 어떤 정신적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쉬지도 졸지도 않는 존재로서, 피곤하여 잠을 자는 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신이라는 말로, 등장인물들과 구별하겠습니다.

 

육신은 지치고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

이때 등장 인물들은 지금 현재 침대에 누워있는 그 육신 속에서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 육신을 다른 곳에 폐기처분하고는 새로운 육신을 침대에 눕힌 다음 등장 인물들은 그 새로운 육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일어납니다.

새로워졌습니다. 키도 자랐습니다.

어제의 피곤했던 육신이 아닌, 새로운 육신을 덧입은 것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성경 속 친밀함이나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는 늘 덧입힘을 입어야 한다는 자체가 이제는 어렵지 않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되시길 바라며 축복하는 바입니다

출처 : Dean`s Study (딘스 스터디)
글쓴이 : yimych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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