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선교사를 조선으로 부른 데이비스 선교사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이끈 이는 젊은 선교사인 조샙 헨리 데이비스 (Rev. Joseph Henry Davies, 1856-1890)이다. 데이비스는 누이 메리 데이비스(1853-1941)와 함게 인도에서 사역을 하였으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귀국을 하게 되고 요양을 하며 그 다음의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나타내실 일에 대하여 꿈을 꾸고 있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그가 4살 때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직접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할 목적으로 호주 씨 엠 에스(Church Missionary Society)소속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오고 도 다시 다음의 선교를 위하여 준비를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기 위하여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박토리아 장로회에서는 목사 자격이 있어야만 파송될 수 있다고 하였다. 멜버른 남노회는 데이비스가 에딘버러에서 6개월간의 신학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할 것이라 하여 데이비스는 에딘버러대학교의 뉴칼리지 (New College)로 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멜버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 고시에 합격하였고, 빅토리아주 장로교단 설립 50주년 총회기념인 1889년 8월 5일 스카츠 장로교회(Scots Church)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월푸 (J.R.Wolfe) 선교사가 부산을 방문하여 부산의 실정을 보고 작성한 부산 여행기와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멜버른의 매카트니 목사(H.B.Macartney)에게 보냈고 매카트니는 이를 한 선교잡지에 게재하게 하엿으며 이를 본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선교에 마음을 품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누이인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1889년8월22일 호주 멜버른 항을 출발하여 1889년10월2일 부산에 도착을 하였으며 처음 데이비스에게 보인 부산은 자신이 사역을 하여야 할 곳이라고 믿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선교사에게 현지에서 먼저 필요한 것이기에 조선어를 배우기 위하여 3일간 배를 타고 서해안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5개월 동안 조선어를 공부하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어 처음에는 군산으로 생각하였으나 얼마 후 처음 조선땅을 밟았던 부산으로 자신의 사역지를 정하여 발걸음을 때기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성경, 전도지, 소책자, 의약품을 준비하여 누이는 서울에 남기고 어학선생및 비서와 함게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수원, 천안, 공주, 남원, 하동, 함안을 거치며 조선의 사람들을 만나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활동을 하는 중 장거리의 도보로 인한 불편하고 긴 여정 끝에 1890년4월4일에 부산에 도착을 하였으나 부산에 도착하기 전 5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다. 이를 안 캐나다인 게일 선교사 (J.S.Gale)는 즉시 그가 머문 숙소로 찾아가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보살피고 일본인 의사인 기타무라(北村)에게 급히 연락 오게하여 진료하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 다음날인 4월5일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며 육신은 부산 영선동 복병산 기슭의 묘지에 묻히게 되고 말았다. 그의 묘비에는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To Live Christ, To Die Gain) 라고 적혔다. 하지만 그간의 관리 부실로 인하여 묘와 비석은 찾지 못하고 아쉽게 사라졌다.
조선에 대한 선교의 꿈을 품고 준비를 하였으나 아무것도 펼쳐 보지 못한 젊은 선교사,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셨다. 데이비드의 비보는 그를 파송하였던 호주 멜버른에 있는 호주 빅토리아 선교회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데이비스의 고귀한 순교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 하였다.
데이비스로 인하여 호주의 조선 그곳도 부산 지역에 대한 선교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지원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호주의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891년10월에는 맥케이 (J.Mackay) 선교사 부부, 멘지스(B.Menzies), 페리(J.Perry), 포셋(M.Fawcett)선교사가 입국하여 부산, 경남 땅에서 성교사역을 펼치게 되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는 데이비스 선교사 이후 조산 땅으로 12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데이비스의 누이 메리는 서울에 남아 선교를 하게 되었으나 폐렴에 결려 고생하여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후 한국을 떠나 1890년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호주 선교부는 평양신학교의 설립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기숙사로 빅토리아기념관을 건축하여 평양신학교에 기중하기도 한다. 이 빅토리아 기념관은 신사참배를 각종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개인 자격으로 황해도 솔내교회에 가서 사역 중 뜨거운 열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매킨지 선교사로 인하여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조선 선교에 불을 당긴 것 같이 데이비스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떠났지만 그로 인하여 호주의 조선에 대한 선교가 실질적으로 시작되고 확장되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