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 환자에 평생을 몸 바친 선교사
맥켄지 Mackenzie, James Noble (1865-1956)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105-2번지에는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에서 30년간(1910-1939) 활동하면서 특수 의료선교사로 나병(癩病, Hansen) 환자를 위하여 평생을 몸 바친 J. N. 맥켄지 가족(아들) 제임스 아더 고든(James Arthur Gordon)의 묘가 있다.
1921년 3월 2일 출생하여 1922년 12월 27일 디프테리아로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부산외국인묘지(부산시 중구 동광동 5가 26번지 추정)에 안장되었다가 경남 진주시(평거동 298-2번지)로 이장되었으며, 1992년 6월 9일 현재의 부산진교회 묘역으로 재 이장되었다.
묘비에는 ‘In memory of little Jim. son of Rev. J. N Mackenzie, died 27. Dec. 1922. 쳔국에 있는 자가 어린 아해와 갓으니라’라 쓰여 있다.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성자로 불린 맥켄지
제임스 노블 맥켄지(Mackenzie, James Noble, 한국명: 梅見施)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 에웨(Ewe)섬에서 출생했다.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플록톤(Plockton)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5년 글라스고(Glasgow) 대학에서 라틴어와 헬라어와 의학교육을 받고 졸업(1891)하였다. 트리니티(Trinity) 대학에서 신학도 공부했다. 1894년 7월 3일 영국에서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와 결혼하고 9월 21일 런던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였다. 1894년 12월 멜버른(Melbourne)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895년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식인종이 사는 산토(Santo)섬에서 15년간 봉직하였다. 1908년 12월 4일 부인과 사별한 뒤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여 1910년 1월 5일 호주 여전도연합회 후원으로 멜버른을 떠나 2월 21일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부산(釜山府 釜山面 凡一洞)에 거주하면서 미국선교사 엥겔(Engel, 王吉志) 등과 연합하여 영남지역의 순회 전도를 시작했다. 이 기간 중 동래에서 금사리(錦絲里)교회 시무를 비롯하여 화전(花田)교회를 설립(1912)하고 내리(內里)교회도 설립(1922)하였으며, 울산에서 평동(平洞)교회도 설립(1915)하였다. 부산진교회 당회장(1914, 1919, 1925)으로 시무한 바 있으며, 일신학교 설립자 대표(1915)로 영남지역 교육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 창립(1911.12.6) 당시부터 경남노회로 분립(1916.9.20)된 이후까지 노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목사가족 구제위원(1919), 재단법인 교섭위원(1923), 부산시찰위원(1926-30), 경남노회 재단이사장(1934-1937) 등의 직분을 담당하였다.
특히 맥켄지는 부산에서 상애원(相愛園) 운영을 통하여 나환자(한센병자)들을 위한 특수 의료선교에 평생을 헌신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상규 교수는 「부산지방기독교전래사」에서 “나병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으로 가족으로부터 격리되고 의료 혜택도 누릴 수 없어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용할 양식과 의료 혜택을 베푸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만 가능한 거룩한 사역이다”라고 했다.
부산 상애원은 1912년 5월 맥켄지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름 지어지고 활성화되었다. 당초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어빈(Irvin, 魚乙彬)에 의하여 부산 감만동에 자리를 잡았다. 1909년 부산지역이 호주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정해져 운영권이 호주선교부에 이관되었다.
맥켄지는 목사와 의사로서 상애원 환자들에게 쏟은 정성이 지극하였다. 1911년 40명의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1938년에는 600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대 전국의 나환자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6-7천명이 경상남도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맥켄지의 상애원 운영은 더 큰 관심과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 삶의 여건을 개선하고 약물 치료를 통하여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1917년부터 피하주사(대풍자유)를 사용한 이후 25%의 환자 사망률을 2%로 줄이는 놀라운 성과도 거두었다. 상애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활하는 생활공동체 기능과 신앙 수련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공동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1년 한국에서 의사면허증을 받았으며 나환자를 위하여 평생을 몸 바친 삶에 대하여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침울하고 맥이 빠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나환자 가운데 살면서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교 사업은 없다”고 했다. 그 후 1939년 6월 30일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여 1956년 7월 1일 별세하였다.
한편, 한국에서 33년간 봉직한 맥켄지 부인 M. J. 켈리(Mary Jane Kelly)는 1905년 독신 여성 선교사로 호주에서 내한하여 한국에서 1910년 8월 8일 약혼하고 1912년 2월 10일 홍콩에서 결혼하였다. 부산(1906-1907)과 진주(1907-1910) 등 영남지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남편의 특수 의료선교 사업을 보살피고 인근 시골교회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와 부인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다. 켈리는 1938년 은퇴하고 호주로 돌아가 1964년 1월 11일 별세하였다. (2008. 9. 19. 교회복음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