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여왕에게 맞섰던 존 낙스
나의 조국을 주소서
에딘버러 성과 홀리루드 왕궁을 연결하는 로얄 마일 (Royal Mile) 주변으로 각 시대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교회와 여타의 유적들이 곳곳에 정렬해 있다.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평시에는 홀리루드 궁전에서 생활하다가 전시에는 로얄 마일을 이용하여 에딘버러 성으로 피신하곤 했다.
매 년 8월에 열리는 에딘버러 축제 기간 동안 로얄 마일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홀리루드 궁전에서 로얄 마일 길을 따라 에딘버러 성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캐논게이트 교회를 먼저 만난다. 이 교회 묘지에는 메리 여왕의 개인 비서이자 악사였던 데이빗 리치오가 묻혀 있고,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가 잠들어 있다. 캐논게이트 교회가 홀리루드 궁전과 가까이에 있는 관계로 현재 영국 여왕인 엘리자벳 2세가 에딘버러를 방문 할 때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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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게이트 교회를 떠나 로얄 마일의 특이한 포장도로를 감상하면서 걷다 보면 존 낙스의 집에 다다르게 된다. (사진 1) 지금은 존 낙스의 유품과 기록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0년에 건축된 이후 증 개축을 거듭해 왔으며 한동안 방치되어 폐가처럼 되었다가 19세기 중엽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소유로 관리되고 있으며, 구연동화센터로도 활용되고 있다.
영국의 전통적인 가옥 구조와 같이, 존 낙스의 집도 언뜻 보기에는 작고 협소해 보이지만,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오밀조밀한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존 낙스의 개인적인 생활 용품들도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16세기 당시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16세기 당시 존 낙스가 이 집에 살면서 때로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로얄 마일을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종교개혁적 삶과 신앙을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사진 2) 자신의 집 건너편에 위치한 성 자일스 교회의 담임목사이기도 했던 존 낙스는 자신의 집과 교회 사이에 놓인 로얄 마일을 왕래하는 이들에게 피 토하는 열정으로 옳은 길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특히 홀리루드 궁전에서 퇴폐와 향락과 구교 미사를 드리고 있었던 메리 여왕이 지나갈 때면 존 낙스의 목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할 정도의 두려움이었다고 한다.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을 방문하여 네 번에 걸쳐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메리 여왕이 장차 통합 왕국의 제왕이 될 제임스 6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를 임신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낙스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여왕의 종교적인 신념을 바뀌어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결국 존 낙스의 거센 도전에 당황한 메리 여왕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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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는 아무리 국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세속 권위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즉, 신법에 충실한 국왕의 권위만 인정하였다는 말이다. 그런 견지에서,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이 구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그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여왕 앞에서 기립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프랑스 왕실에서 자란 메리 여왕의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리 여왕은 존 낙스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메리 여왕은 ‘유럽 전역에 있는 모든 군대의 힘을 합친 것 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두렵고 무섭다’고 말하면서 전율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조국을 주시든지 아니면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라고 외쳤던 한 종교개혁가의 목숨을 건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존 낙스의 집을 둘러 보면서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민족보다 강하다’는 말이 폐부 깊숙이 파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