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명 정도의 성도들을 섬기시던 시골의 목사님께서 사십 일 금식을 선포하시고 산으로 향하셨다. 성도들을 더 품게 해 달라고, 더 섬기게 해 달라고, 더 사랑하게 해 달라고 목숨을 내놓고 기도하기 위함 이셨다. 성도들은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격려했고, 목사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부흥하겠다고 다짐하며 산을 오르셨다.
하루, 이틀, 십 일... 십 오 일... 미친듯이 부르짖으셨다. 나무 뿌리도 뽑으셨고, 땀방울이 거의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찾아왔고, 속을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셨다. 결국 목사님께서는 이십일 정도 될 즈음에 금식을 포기하고 하산을 결심하셨다. 일만 가지의 생각이 찾아왔다.
'어떡하지? 성도들이 나를 뭘로 알까? 사십 일 금식을 하겠다고 큰 소리 뻥뻥 쳤는데, 내 꼴이 뭐람? 실망하겠지? 아니, 나를 무시하겠지? 그냥 몰래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까? 아니야... 그럴 수는 없지.'
목사님께서는 핸드폰을 어렵게 켠 후 안수 집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금식 중단 소식과 더불어 하산 소식을 알리셨다. 패배자의 모습으로 통화를 마친 목사님께서는 금식 마무리 기도를 드린 후 축져진 어깨를 가누시며 산 아래로 향하셨다.
터벅, 터벅... 2 시간 정도 내려오니 평지가 보인다. 거의 다 내려오신 듯 하다. 평지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누굴까? 잘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께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으신 채 산 아래로 향하신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 수록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냄새가 맡아진다. 마음이 느껴진다. 이럴 수가! 스무 명 정도 되는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손에는 "목사님, 수고하셨어요," "목사님, 너무 자랑스러워요"라고 쓰인 피켓이 들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 사랑합니다"라는 진심 어린 격려와 위로의 함성도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게다가 안수 집사님의 손에는 끓인 지 얼마 안되는 따뜻한 죽이 들려 있다. 모든 성도들이 사십 일 금식에 실패하고 하산하시는 패잔병 목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목사님의 심장이 멎는듯 했다. 비판 받고, 욕먹고, 꼴불견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 반대되는 현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아는가? 만약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담임 목회를 해봤다면 알 것이다. 아무리 미련하고 모자란 목사라도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송두리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솟는다는 것을 말이다. 금식에 실패하신 목사님께서도 예외는 아니셨다.
목사님께서는 눈에서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으셨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감격의 탄식을 억제할 수도 없으셨다. 금식에 실패한 자신을 질타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는 성도들을 위해 이대로 내려갈 수는 더더욱 없으셨다. 그래서... 등지고 내려오던 산을 향해 다시 몸을 돌리신다. 그리고 내려왔던 산 정상을 향해 다시 올라가신다. "저들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저들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되 뇌이시며 금식의 줄을 다시 잡으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텍사스의 작고 작은 엘파소에 있는 무명 목사님의 사십 일 금식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
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목사님 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성도들도 목사님들의 부족한 점들을 손가락질 하기 보다 잘 하시라고 격려해 준다면 어떨까? 비록 남들이 볼 땐 “바보 목사”와 “바보 성도”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갖고 있는 교회로 하나님께 인정 받지는 않을까? 그런 교회가 무척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