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로마서 9장 3, 4절) 복음은 국경을 초월하는 세계적인 우주적인 복음이지만 그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섬겨야 할 조국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에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이나 겨레에 대한 애국심은 함께 나가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신앙이요 바른 신앙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33세 되던 해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묘비에 적혀지기를 원하는 묘비문(墓碑文)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이 비문은 토꼬의 타마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묘에 일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 ③
1905년 2월 10일 우찌무라 선생이 42세 되던 해에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성서 연구』에 ‘실망과 희망, 일본의 미래’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다음같이 쓰고 있다.(전집 11권 49쪽) “우리에게는 천지간에 사랑하는 이름이 두 개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예수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우리는 이 두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미래는 예수에게서 있고 우리의 현재의 삶은 일본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과거와 미래는 같기 때문에 예수와 일본은 꼭 같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조국을 위해, 우리의 애국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할 수 없듯이, 조국과 분리되어서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 할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일하게 그것으로 사랑하는 일본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찌무라가 이같이 일본을 극진히 사랑하였기에 일본의 미래에 대하여 깊은 염려를 하였다. 영국의 내전 시기에 애국자 존 햄던(John Hampden, 1594~1643)이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남긴 말을 자신의 말로 인용하였다. “오, 하나님, 이 비참한 나의 조국을 구해 주소서!” 이는 국적이 무엇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외침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로마서 9장 3, 4절)는 바울의 간절한 기도를 본받아 우찌무라 역시 말하였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 ④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당시에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하고 만주에 이어 중국까지 침략하던 때에 반전운동, 평화운동을 펼쳐 극도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일본군이 전쟁 초기에 연전연승하는 전황이 보도되자 일본 국민들은 모두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분위기에 맞지 않게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참으로 탁월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가는 곳마다 전승(戰勝) 분위기에 들떠 있던 때에 전쟁을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용기다. 당연히 그는 세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국민(非國民)으로 매도하였다. 일본사회에서 비국민이란 말은 매국노(賣國奴)에 해당하는 말이다.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일본 사회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초지일관되게 소신을 펼쳤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 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비국민(非國民)으로 몰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자신의 집 여섯평 다다미 방에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심을 기울였다. “일본을 성서위에 세우겠다”는 일념을 품고 성경으로 젊은이들의 혼을 깨우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일본이 제국주의 근성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에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가미사마(하나님)께서 일본 하늘에 불벼락을 내리실 것이란 발언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진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과연 그의 말대로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이란 불벼락이 떨어지게 되고 일본이 패전케 되자 사람들은 우찌무라 간조야말로 시대의 양심이요 예언자라 칭송하는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